“다운 인 어 홀”, The road of down in a hole (EP)




[ 2006, 한국, WASP/DNC ]

“제노사이드”, “싸일런트 아이”, 등을 거친 보컬리스트 “서준희”가 2003년 결성한 밴드 “다운 인 어 홀 (Down In A Hole)”은 밴드 이름(Alice In Chains의 곡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가 꾸준히 해왔던 블랙-데쓰 계열의 음악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DIAH의 데뷔 음반은 잘 짜여진 악곡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녹음한 티가 나는, 잘 만들고도 아쉬운 음반이었다. 이후 “수요예술무대”와 같은 오버그라운드 무대까지 넘보던 밴드는 어느날 자취를 감추었고 잊혀진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후 DIAH의 주인격인 서준희는 홍대 앞 클럽 “WASP”의 주인장으로 변신, 홍대 앞에서 점점 지분을 잃어가는 메탈 계열 밴드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기도 했다. DIAH은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할 무렵인 2006년 벽두에 튀어나온 이 음반은 “참 잘했어요” 도장을 꽉 찍어주고 싶은 음반이다.

기타리스트 “이동규”와 보컬이자 주인장 서준희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된 상황에서 발표된 새 EP는 과거와 거의 단절에 가까운 파격적인 변신을 들려준다. 데뷔 음반에서 “CInderella”의 곡을 커버한 것이 우연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는 미국적인 멜로디와 서준희 특유의 개성넘치는 보컬이 적절히 결합되어있다.

이 음반은 1년여 동안 띠엄띠엄 녹음한 5곡(1집에 수록되었던 「Elegy」의 재녹음을 포함)의 모음집 성격이기 때문에 완전한 일관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대신 전반적으로 밴드가 추구하는 바가 깊이있는 멜로디와 세련된 악곡을 추구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히 짚어진다.


끈끈하게 늘어지는 보컬에서 그로울, 샤우트, 팔세토까지 다양하게 해내는 서준희의 보컬은 정말 개성있다. 그리고 이런 팔색조 보컬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화려한 기타연주와 잘 어울리는데, 특이하게도 서준희는 묵직한 기타들과 더 성공적인 조화를 이뤄내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이대의 DIAH은 싸일런트 아이 1집 이후, 가장 그의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밴드인 셈이다.

DIAH의 새 EP는 흔히 Alternative Metal이라고 분류되는 음악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성격이다. 그러나 그 동네 음악 특유의 뭔가 메탈도 아니고 그런지도 아닌 허전함 따위는 기대하지 마시라. 밴드의 핵심이 되는 두 멤버의 연륜이 반영된 듯, 리프와 톤에 있어서 톱니바퀴처럼 꽉 짜여진 음악이니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라면 좋은 연주임에도 좀 더 맺고 끊음이 확실했으면 싶은 드럼 플레이인데, 이 부분은 연주력의 문제라기 보다 취향(내가 워낙 딱딱 끊어지는 분절음을 선호한다)이기 때문에 이를 음반에 있어 문제로 제기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심벌웍은 아주 빼어나다.

앨리스 인 체인스를 좋아했던 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음반이고, 앨리스 인 체인스를 모르더라도 굴곡이 심한 리프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보컬을 좋아한다면 강하게 추천하고픈 음반이다.


영진공 헤비죠

“콘스탄트 가드너”, 생명 위에 군림하려는 제약회사의 탐욕








*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 출연: 랄프 파인즈, 레이첼 와이즈, 위베르 쿤드 

이 영화 (원제: Constant Gardener, 2005)는 인권 운동가인 케사(“레이첼 와이즈”)와 외교관 저스틴(“랄프 파인즈”)을 통해 케냐라는 빈국의 현실과 이를 이용해 먹는 제약회사의 비도덕적 임상실험을 다큐멘터리적인 자세를 취하며 관객들에게 고발하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쓰리비’ 라는 제약회사는 겉으로는 케냐의 빈민들에게 약을 무상 제공하며 선행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뒤로는 신약 개발의 효능을 위한 불법적 임상실험을 자행한다. 이런 제약회사의 비도덕적 모습은 불행하게도 영화 속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3대가 놀고 먹다 지치게 만들어줄 신약 개발에서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제약회사들은 물가가 낮고 규정이 느슨한 빈국으로 임상실험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인도 역시 이러한 요건에 잘 맞는 나라 중 하나로 최근 많은 임상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는 2차 대전 종전 후 뉘렌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임상실험을 실시했던 나치의 과학자들을 처벌하였다. 이 재판을 기초로 한 뉘렌베르크 강령은 이후 임상실험에 관한 국제적 법령이 되었다. 이 법령의 핵심은 의사는 지원자에게 실험에 따른 모든 부작용에 대해 이해시킨 뒤 자발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령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인도에서 임상실험에 참여한 지원자들의 대부분은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가난한 빈민으로 임상 실험 내용을 이해시키기 어려울뿐더러 심지어 영어로만 쓰여 있는 임상 실험 동의서도 있었다. 게다가 치료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빈민들은 실험을 통해서라도 치료의 희망을 얻고자 실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동의를 하는 경우도 많아 이런 경우 의사의 도덕적 판단에 의존해야만 한다.

임상실험의 위험은 무엇보다 실험 전까지 행해졌던 모든 치료가 중단되고 신약의 효능을 위해 2~3개월 동안 세척기간이라 하여 일체의 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이나마 차도가 있던 치료를 중단하게 만든다. 게다가 실험 지원자 중에는 플라시보약(가짜약)을 투여 받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강대국들의 허울 좋은 깃발 아래 빈익빈 부익부는 가히 ‘세계화’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세계화의 물결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의료분야에서도 이렇게 비극을 만들어내었다.

사람의 목숨이 수익이라는 물질적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고 있는 이 씁쓸한 현실에서 웃을 수 있는 것은 강대국과 다국적 기업 그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이들 뿐일 것이다.

 한미 FTA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협상내용에 의약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제약회사의 신약에 대한 특허권 보호를 위해 값싼 복제약의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미국이 자국 제약회사의 이익증대를 위해 요구한 것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보험료 인상을 불러오고 약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매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영진공 self_fish

 

[근조] 김추련


김  추 

(1946 ~ 2011. 11. 8.)


 출연작: ‘다음 영화’ 사이트 링크                    

대표작: 겨울 여자” (1977, ‘YouTube’ 링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괴물”과 “플란다스의 개”, 공통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 같은 구조의 영화다. 단지 첫 번째 영화에서 관점을 고르게 배분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한쪽의 관점만을 드러냈고, 사건이 좀 더 극적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두 영화는 모두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 두 사건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 번째 사건이고 첫 번째 사건은 그냥 지워지고 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첫 번째 사건은 윤주(“이성재”)의 ‘개 유기 및 살해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후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윤주의 이 범행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넘어간다. 『괴물』에서는 미군의관의 ‘포르말린 방류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괴물은 이로 인해 탄생하지만 역시 그 사건도 영화에서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지워지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물론 ‘윤주네 개(순이) 납치/도살기도 사건’과 ‘괴물의 출몰사건’이다.)


둘째, 사건이 둘인 만큼 범인도 둘이지만, 이 두 범인에 대한 처분은 극과 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교수가 되는 데에 성공하며, 『괴물』의 미군 역시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생화학전 실험을 하는 기회를 얻는 이득을 본다.

반면에 이들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은 사람들의 눈에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처벌당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자(“김뢰하”)와 <괴물>에서 괴물이 바로 그 역할이다. 이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할 뿐 특별히 악의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즉, 만약 개고기 맛을 볼 기회나 포르말린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이라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저 멍청한 노숙자로서, 한강의 물고기로서 단순한 삶을 마치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당구대에 비교하자면 이들은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친 공에 맞아서 그대로 굴러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어난 모든 문제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처벌당한다. 지나친 처벌인 것이다.


세째,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와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따로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유발자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제
를 해결하는 자는 배운 것 없고 지위도 낮고 권력도 없는 자이다.

심리학 박사인 윤주는 자신이 개를 죽여 놓고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를 납치당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미군 역시 포르말린을 방류해 괴물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로 인해 애꿎은 사병 하나가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윤주와 미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쉽게 말해서 무고한 존재들이 짊어지고 해결하며 그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그들이 다 뒤집어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무고한 인물은 현남(“배두나”)이고, 『괴물』에서는 강두(“송강호”)네 가족이다. 현남은 납치된 개를 찾아서 윤주에게 돌려주었으나 결국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토록 원하던 TV출연 마저 이루지 못한다. 강두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큰 희생을 치렀을 뿐, 그로 인한 어떤 공치사도 받지 못한다. 뉴스와 신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일 벌린 넘들은 어디 가고...

덧붙여, 이런 이야기가 유지되기 위해서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언제나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만 받는다.

현남은 직장 상사로부터 맨날 할 일을 빼먹고 싸돌아다닌다고 비난받으며, 강두네 가족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도주한 위험인물들로 체포 대상이 된다.

고독한 현남을 응원하는 건 상상의 관중들과

현남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현남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비상구에 가득 쌓인 물건들과 닫힘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이나, 강두네 가족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분류해 끌고와서는 아무 대책없이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노출시키는 병원시스템이 바로 그런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익숙하다

결국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난 감독의 관점은,

이 세상은 사고치는 놈과 해결하는 놈이 따로 있으며, 좀 배우고 권력 있다는 놈 치고 제구실 하는 놈 없고, 오히려 그 빈틈은 못 배우고 권력 없는 민중이 대신 해결해온, 본말전도의 법칙에 따르는 세상이다.


영화 괴물에서 반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은 반미라기 보다는 반권력, 반시스템, 반지식인 이다. 윗대가리들만 제대로 하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들로 인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점이 지나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을까?
글쎄 … 경제위기, 4대강, 용산참사,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위기와 참사들을 생각해봐도 이런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윗대가리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고,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무고한 민중들이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경제위기, 외환위기 때 금융시스템을 비판하고 고치기는 커녕 엉뚱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실제 정부의 행태나, 정작 괴물에는 신경쓰지 않고 엉뚱한 바이러스 공포만 퍼트리는 영화속 정부의 행태가 크게 다른가?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같은 정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다른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