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감독’이 아닌 그냥 동일한 ‘사람’일 뿐 – PIFF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5)



PIFF 빌리지 오픈카페 – 도대체 아무리 국제 행사라지만 ‘한글’로 된 장소명은 없냐능 – 에서 벌어진 ‘아주담담’ – 어차피 행사명은 한글이면서 말이죠 – 중 제 관심사와는 별개로 시간이 남는 바람에 관람하게 된 것이 <한국의 여성 감독들>이란 주제의 대담이었습니다.


오픈 카페 행사치고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경우인데요. 아마 대부분의 PIFF 행사 관객이 ‘여성’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5인 감독인데 이 중 임순례 감독을 제외하곤 전부 최근 ‘잇뽕’을 한 감독들입니다. – ‘잇뽕’도 이라는 일본어죠. 뭐 어차피 데뷔도 우리말 아니고. –



사실 진행자의 질문부터 시작해서 좀 뻔한 이야기였어요. 다들 ‘연출부’의 일을 겪었느니, 스크립터 일을 했을 때 경험이 도움됐다. 이런 식인데…. 이건 너무 상투적이잖아요.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에서 ‘씨다’ 생활 안 하는 사람은 엄친아나 엄친딸 밖에 없지 않나요? – 물론 제 주위의 엄친아들은 다들 씨다 생활 합니다 ㅡ.ㅡ –

관객들이 그나마 궁금할 수 있던 ‘여자라서 힘든 점’을 묻는 이 뻔한 레퍼토리는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했어요. 그만큼 이 나라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사실 제가 ‘여성 감독’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미국 드라마 <ER>의 감독 ‘미미 레더’가 <딥 임팩트>라는 영화를 감독할 때 ‘여성 감독’과 ‘남성 감독’의 시선 차이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거든요.

당시에 <딥 임팩트>는 똑같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소재로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이 되어버렸어요. 결론은 <아마겟돈>의 승리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저는 <딥 임팩트>가 훨씬 섬세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점이에요.

더군다나 <딥 임팩트> 이전에, ‘미미 레더’가 감독했던 <피스 메이커>는 액션 영화의 감각 또한 ‘여성 감독의 시선’을 씌우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전 거기에서 하나 더 의문이 들었죠.

시장 논리와 비슷한 것인데, 제가 미미 레더 감독의 이런 ‘시선’을 통한 영화들에 신선한 감각을 느끼면서 즐거워할 수 있지만 과연 ‘다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선택할까라는 의문이 든다는 거죠. 심지어 여성 관객층이 엄청나다 하더라도 흥행성을 비롯하여 영화의 선택에서 이 ‘여성’ 들이 과연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여성 감독의 영화라서 ‘여성 다수’가 공감한다는 건 억측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무모한 주장? 또 다른 편견?

사실 PIFF 행사에서 ‘여성감독들’이란 주제로 아주담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여성의 시선’이라는 것이 하나의 독립적일 수 있는 인간의 관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전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죠.

남성 감독도 여성만큼 섬세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고, 여성 감독의 이야기가 남성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퍼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고 ‘아~ 여성 감독이라서…’ 라고 잣대를 댄 이야기를 충분히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럼 뭔가요?

장애우 감독이 등장해야만 장애우의 시각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나오나요? 레즈비언 혹은 게이 감독의 영화가 등장해야 ‘제대로 된 시각’을 반영할까요?

또 다시.

결국 소통 이야기로 흘러가는 <은하해방전선> 같은 뻔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우리는 ‘남성중심의 사회’이자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면서 ‘군대의 상하 계급 문화’를 적용시킨 일종의 ‘병영국가’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시각’이 새롭게 비치는 것은 그만큼 ‘볼 수 없었던 시선’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비주류’였기 때문이죠.

영화도 똑같은 거예요. 우리 모두 할리우드 키드이자 홍콩 키드죠. 한국 액션 영화가 60년대에 어떤 영광을 누렸든 간에 – 제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팔도사나이나 손가락 7개? 8개만 가지고 액션을 펼쳤던 영웅도 남아있지만 결국 영웅본색과 같은 느와르나 무협영화, 강시영화 아니면 전부 할리우드 영화니까요 – 머릿속에 그동안 보아온 영화가 그런 ‘엄청난 영화들’이었으니 여성 감독들이 뱉어내는 이야기들이 ‘신선’하다고 보이는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뜬금없이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도 아니죠. 그들의 시각이 ‘신선’하다구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관련 주 소비층은 이미 여성이 다수입니다. 20~30대의 여성층이 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죠.

덕분에 여성 감독의 잇뽕도 늘었죠. 이뿐인가요? TV를 비롯해 드라마작가, 구성작가 다수가 여성이에요. 이 여성들이 내뱉어내는 이야기에 남성상이 그려지고 여성상이 그려지고 있어요. 보수적인 – 나쁜 의미의 보수가 아닌 – 남성들은 그런 TV 시스템에 숨막혀 갈 곳을 잃어가고 있지요.

아마 어떤 페미니스트가 보면 기가 찰 겁니다. 아니 아직도 이 사회의 양성 평등은 갈 길이 먼데 무슨 헛 소리냐고.

관객과의 질문대답 시간의 가장 마지막에 제가 물었던 질문의 요지는 딴 게 아니었어요. ‘여성 감독’이라는 주변 시각 때문에 영화감독으로써 이야기를 매만질 때 ‘자체 검열’을 하게 되는 경험이 있는지가 궁금했죠.

임순례 감독의 대답은 참으로 ‘당연하고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감독이라면 제작자의 압박이고 나발이고 ‘하고픈 이야기’를 해내야죠.

이건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어요.

내가 우파인데 자신 있게 우파라고 얘기 못 하는 사람들 – 좌파도 마찬가지 -.

주변 시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믿는 바를 꺾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려 놓고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만드는 영화가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포장되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거예요.

사람은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 동물입니다. 이때의 ‘합리’라는 것은 이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성에 합치하려는’ 것을 말해요. 여성 감독들에게 거는 기대가 남성 중심의 시각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라면 그건 억지스런 주장일 수밖에 없어요. 이미 대다수의 여성 감독을 노려야 하는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씨다’를 거쳐 입뽕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물론 감독들의 말마따나 ‘영화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다고 믿는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내고 이야기 해야 하는 이 사회는 안 그렇다는 거죠. 동떨어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순 없잖아요? 그리고 임순례 감독의 그 섬세한 이야기 밀도를 보세요. 그게 ‘차별’을 안 겪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던가요?

결국 ‘깨어 있는 사람’이 그 마음을 잃지 않고 ‘감독’이 되어야 – 아니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서는 ‘제작자’가 되어야 라고 쓰고 싶습니다만 – 하겠지만. 역시나 어려운 일이죠.

그냥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감독이라서 달라’가 아니라 사회의 차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감독. 그 감독의 성별이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결국엔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여성 감독의 영화’로 분류하면 할수록 그건 ‘우리 이야기’로 100% 동화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영진공 함장

[영진공 64호]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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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동상이몽


[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자는 허탈한 표정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남자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여자에게 말한다. “미안해.” 여자는 표정을 가다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여자의 괜찮다는
말에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괜찮다는데 무어라 말을 할 것인가?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실망감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오늘도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 갓 체위 하나를 시도했을 뿐인데, 남자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조루는
젊고 건강한 남성성의 표현일 따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짧은 플레이 시간에 남자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사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여자도 괜찮지 않았다. 모텔에 들어와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치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30분이었다. 게다가 애무만 20분.
그런데 막상 본 행사는 1분이라니. 여자는 평소 신앙심 깊은 신자였지만, 오늘은 신이 인간의 섹스를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설계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원망까지 하였다. 게다가 오늘은 가장 안전한 날이었다. 임신 가능성 제로인 오늘은 한 달을 기다려 얻은 신의
축복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긴, 30일 간의 기다림을 단 1분 만에 끝내다니. 그저 허탈한 마음뿐이었다. ]


어려운 상황이다. 남자로서는 한 없이 창피한 상황인 것이고, 여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장면이다. 그렇다고 남자는 계속
창피한 표정만 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체면이 있지. 이정도의 고난에 마음 약해져서,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은 가오가
서지 않는다. 상황을 역전시킬 무언가 액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마땅한 것이 없다. 허풍이라도 치고 싶지만, 오히려
유치한 변명이 될까봐 고민스럽다. 여자 역시, 실망했지만 실망했다는 표현을 하기 쉽지 않다. 행여 남자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미안해 질 것 같다. 실수로 “풋”하고 웃었다가, 헤어진 커플도 여럿 봤다. 그래서 오히려 남자가 허풍이라도 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옆에서 그 허풍에 맞장구라도 쳐 줄 텐데.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오히려 여자가 미안하다.

남녀는 서로의 생각에 잠시간 말이 없다.
침대 위로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남녀의 동상이몽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조루에 대처하는 남자의 세 가지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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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지금 이 상황이 진심은 아니야.."

보통 이 경우, 입을 먼저 여는 것은 남자다. 어찌되었건, 현 상황의 원인제공자는 남자니까. 남자입장에서 특별히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막상 말을 꺼내면 휘두를 수 있는 변명꺼리는 여럿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변명은, 원인을 외부환경이나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돌리는 것이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래. 게다가 왜 이리 조명은 밝은 거야?”
이런 변명, 의외로 효과적이다. 주위 환경이나 몸 상태가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섹스 시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자 입장에서도 “그래. 다음에 잘 하면 되지.”라며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변명에는 부작용이 있다. “다음에는
정말로 잘해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되게 되며, 이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에는 정말 잘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또 못하면 “몸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야.”라는 지금의 변명은 거짓이 되며, 억지로 구겨 세웠던 남자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섹스를 할 때마다, “오늘도 몸이 이상하네? 오늘은 왜 이리 방이 어두운거야?”라는 변명으로 일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정말 다음에 잘 할 자신이 있거나, 혹은 열심히 단련하고 훈련하여 강해질(?) 자신이 있거나, 혹은
다음부터 이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을 계획이 아니라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변명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조금 현명한 남자라면 훨씬 더 담백한 변명을 하게 된다. “미안해.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이해해줘. 다음부터는
정말 잘 할게.” 이런 변명 얼핏 들으면 정말 쿨해 보인다. 남자라면 누구나, 침실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강력한 변강쇠가 되거나,
혹은 섹스를 온몸으로 마스터한 섹스 킹이 되고 싶고 싶어 한다. 그런 남자의 일반적인 침실 판타지를 이겨 내고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런 종류의 변명을 하는 남자들에게 박수를! 용기를 내어 한 변명이고 고백이기에 여자들도
남자들의 진심을 이해한다.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안 된다는데 무어라 할 것인가? 그저 잘 하라고, 다음에는 더 잘 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밖에. 그러나 여자들도 알고 있다. “앞으로 더 잘 할께”라는 남자들의 이런 종류의 변명은, 학창시절
성적표를 받아온 자식이 부모님에게 무릎 꿇고 앉아서 하게 되는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올게요.”라는 변명처럼 진심만
가득하고 실천은 빈약한 고백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믿어야지.

말로 승부를 하는 남자라면 로맨틱한
변명을 꺼내게 된다. “미안해. 참을 수가 없었어. 너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고개를 숙이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하는 남자의 이런 변명에 여자들은 할 말이 없다. 사랑한다는데.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는데. 현재의 상황이
실망스럽지만,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다. 상황을 아름답게 종료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변명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는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찍 끝난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 섹스를 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또한 사랑하면, 사랑하면 할수록 더 빨리 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려 생각하면, 변강쇠와 옹녀의 3시간짜리 한판은 미칠
듯이 미워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결론이 되며,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섹스를 했다면 초단위로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시간이 지나, 그대로 이 남자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몸 컨디션이
좋아 오랫동안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이 남자는 여자에게 무어라 그러겠는가? “오늘은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조루에 대처하는 여자의 세 가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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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도 날고 싶어..."


어색한 상황에서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은 남자지만, 상황을 종결짓는 키를 갖고 있는 것은 여자다. 남자의 변명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위안이기도 하지만, 최종 목적은 여자의 이해를 구하는데 있다. 여자가 납득하고, 이해해야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향후 남녀간의 섹스라이프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여자가 하게 된다.

배려라는 단어는 안드로메다 정도에 날려 버린 여자, 혹은 남자에게 언젠가 한 방 펀치를 날려주기를 벼려왔던 여자, 혹은 쿨함을
가장한 아무 생각 없는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그저 웃을 뿐이다. 그것도 비아냥을 섞어. “사정 한 거야? 아니면 흘린 거야?
흐흐” 남자 입장에서 이런 농담은 거의 치명적이다. 가슴에 칼이 꽂힌다. “째째하게 그러지 말고, 조금 더 힘을 써봐. 아낄 때
아껴야지.” 남자는 아끼고 싶어서 아낀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끝난
거야? 장난하지 마.”이라며 생끗 웃는 여자의 순진한 웃음까지 더해지면, 남자는 처참한 확인사살을 당하게 된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마음속으로 눈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자의 조루현상을 비웃는 여자. 이 남자와 더 이상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다. 물론, 남자가 받을 상처를 예상하지 못하는 순진한 여자거나, 그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쿨한 여자라면, 남자의 상처를 가슴에 난 털뽑기 정도의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받는 상처는 털뽑기가
절대 아니다. 비유하자면 가슴털을 라이터로 지지는 정도가 될 것이다. 가슴에 난 털은 다시 솟아나기라도 하겠지만, 라이터로
지져버린 털은 다시 솟아나지 않는다. 남자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현명한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 남긴다. 남자의 변명은 변명으로 인정하고, 그냥 기다린다. 담배라도 한 대 피던가,
텔레비전을 보던가, 아니면 다시 샤워를 하던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을 보내며,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어떤 타이밍?
남자의 고추가 다시 서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섹스 후에 바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남자의 페니스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정신을 차려 섹스가능한 자세가 갖추어진다. 남자마다 정신을 차리는 그
시간이 다르기에,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남자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그 시간이 달라지며, 여자의
노력이 더해지면 그 시간은 비례하여 짧아지게 된다는 것이 민간 성의학계의 정설이다. 기다림의 열매는 달다 했던가? 두 번째 하는
섹스는 처음에 비하면 훨씬 길어지게 된다. 남자 입장에서도 급한 불은 꺼진 상태이기에 훨씬 여유롭다. 이런 여자의 대응은 굉장히
현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두 번째가 불가능한 남자가 많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라면 두 번째
섹스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한 번에 두 번하는 (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으리라.) 이런 섹스가 쉽지 않다. 삼십대가 넘어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조루 현상이 심한
사람이라면 두 번째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예외 상황을 제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여자의 대처라 할 수 있다.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여자의 대처는 남자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다. 이건 정말 회복 불능이다. 여자가
버럭 화를 낸다고 해서, 남자가 무릎 꿇고 빌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는 이런 행동은 더 이상 관용과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다. 따라서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제
우리 섹스는 그만하자.”가 아니라,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라는 의사표현이 된다. 실제 이렇게 여자가 화를 내서 깨진
커플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여자는 남자가 아주 짧은 시간에 사정을 하며 자체 신기록을 달성하자, 그냥 옷 입고 말없이
모텔을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여자의 소식을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는..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절대 화는 내지 말자는 것이다. -.-


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남자의 변명을 세 가지로, 여자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이건 그저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일 뿐이다. 사실, 상황 분석과 대처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 글 중간 중간 “어쩌라구”라는 추임새를 넣었는데 이게 남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방법이 없다. 조절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섹스 도중 애국가도 부르고, 이번 달 카드 값도 계산해 보고, 김정일 얼굴도 생각해 보고, 부모님 얼굴까지
그려 보고, 심지어는 이차 방정식까지 풀어 보지만, 그래도 조절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저 스스로에 대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기에 뻔히 구질구질한 변명임을 알면서도, 구태여 변명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변명은 해도 안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는 수험생의 안타까운 마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당연히 아쉽다. 밥만 먹으면 바로 한 번씩 때리는 신혼부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중년 부부, 혹은 젊은 연인의 섹스는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기대가 섞인 이벤트가 허무하게 끝나는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조급하게 화를 내거나, 비웃지는 않는다. 남자가 받을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속으로
화를 삼킬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는 여자에게 있다. 넓은 마음으로 남자를 이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남자의 조루 상황을 이해하고, 다독여야 한다. 남자의 변명이 구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깊은 믿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음에 더 잘하겠다는 남자의 다짐 역시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 가득한 신뢰로 믿어 주어야 한다.

조루
란 육체적 감각의 예민함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의 미숙함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예민함이 그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육체적 예민함은 치료가 어렵지 않다. 비뇨기과 병원이나 성인용품 쇼핑몰을 뒤지면 남자 혼자서 수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예민함은 남자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온갖 상업적인 미사여구로
다양하게 포장된 여자의 몸을 단순히 몸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은밀한 판타지로 점철된 섹스라는 행위 역시, 남녀
간에 나누는 단순한 육체적 사랑 행위로 받아들이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굵은 모래와 굵은 소금을 2대 1 비율로 섞어 남자의
페니스를 비비는 철사장 훈련을 30일간 아침저녁 식후 30분씩 하게 되면, 조루가 극복된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건 정신적 조루 증상을 무시하는 발상일 따름이다. 여자의 따뜻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포용이 함께 할 때, 조루는
육체적 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란 그저 남녀 간의 육체적 마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섹스가 단순한 육체의 향연이라면, 인간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결혼제도와 남녀 간의 섹스 갈등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금요일 밤에 하는 부부 클리닉 코너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적 마찰과 더불어 정신적인 감정의 교류가 존재하기에 섹스에
눈물 흘리는 여자와 섹스에 자부심을 느끼는 남자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섹스란,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나오는 성과물 같은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얻게 되는 선물 같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의 따뜻한 배려와 이해만이
조루해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은, 그러기에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말은 아니다. 같은 곳을 향해 보기 위해 여자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이며, 사랑이라는 긴 항해를 위해 올리는 돛단배의 돛처럼 남자의 사랑을 보듬기 위한 섹스의 한 과정일 따름인
것이다.

신앙심 가득한 여자는 문득, “신앙이란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은 지금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신께서 남자와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과 신의 뜻으로 이 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리라. 여자는 그렇게 기도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왜 신은
우리의 사랑을 하필이면, 조루를 통해 시험하시고 계신 걸까?” 여자는 그렇게 자신의 신실한 믿음 위에 솟구치는 의심 하나를
지우지 못한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