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펭귄”, 참신한 배급망을 타고 날아라!

임순례 감독의 신작 <날아라 펭귄>이 9월 24일 개봉하네요.
예전 임순례 감독 작품들보다
훨씬 다양한 루트로
<날아라 펭귄>소식이 들리는 것 같아요.

<워낭소리> 의 제작사 스튜디오 느림보가 배급을 맡았기 때문에 더욱 자주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도 있을테고,

또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정동진독립영화제, 제주영화제,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등을 통해
관객들의 입소문이 돈 탓도 있을 거에요. 


<날아라 펭귄>은 극장 개봉 한 달 전부터
지역 공동체 상영을 시작했어요.
지역 공동체 상영이라 함은 개봉관이 없는 지역의
학교, 회사, 동아리 등 공동체를 위해
강당이나 회관 등의 공간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또 하나의 배급 시스템 입니다.

지역 공동체 상영은 <우리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걸로 알고 있는데요.
<워낭소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등
여러 독립장편영화들도
극장개봉과 공동체 상영을
함께 진행했었죠.  

 

공동체 상영은 상업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획기적인 시스템입니다.
무엇보다 찾아가는 서비스, 관객이 있는 곳에
영화가 직접 간다는 점이 그렇죠.




특히, <날아라 펭귄>처럼 극장 개봉 이전에
지역 관객을 먼저 찾아간다는 결정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요,
개봉을 결정한 극장들과 배급사 제작사 모두가
남들보다 한 걸음 더 전진해 있어 가능했을 거란
예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극장에만 목 맬 필요는 없으니까
여러모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공동체 상영이
훨씬 바람직한 배급 수순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굳이 나누자면 준상업영화 영역에 속한 듯 보인 <우리 생의 최고의 순간> 이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보다
<날아라 펭귄>은 한결 독립영화로
가깝게 닿아 묶인 기분이 들어요.
어쩌면 그 반대로  그 사이 독립영화가 본연의 영역을 확장한 결과이기도 하겠죠.

아무튼 이러한 여러 시도들이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아
좋은 결과가 있었음 합니다.


현재 인디스토리 네이버 공식 카페 공지글에
달린 한 댓글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날아라 펭귄> 임순례 감독님 영화는 꼭!
닥극사(닥치고 극장 사수) 해야 한다는!!

‘닥극사’ 들어보셨나요?
언젠가 ‘공상추’ (공동체 상영 추진!!)
이런 말도 듣게 될까요? ^^

영진공 애플

‘여성 감독’이 아닌 그냥 동일한 ‘사람’일 뿐 – PIFF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5)



PIFF 빌리지 오픈카페 – 도대체 아무리 국제 행사라지만 ‘한글’로 된 장소명은 없냐능 – 에서 벌어진 ‘아주담담’ – 어차피 행사명은 한글이면서 말이죠 – 중 제 관심사와는 별개로 시간이 남는 바람에 관람하게 된 것이 <한국의 여성 감독들>이란 주제의 대담이었습니다.


오픈 카페 행사치고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 경우인데요. 아마 대부분의 PIFF 행사 관객이 ‘여성’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5인 감독인데 이 중 임순례 감독을 제외하곤 전부 최근 ‘잇뽕’을 한 감독들입니다. – ‘잇뽕’도 이라는 일본어죠. 뭐 어차피 데뷔도 우리말 아니고. –



사실 진행자의 질문부터 시작해서 좀 뻔한 이야기였어요. 다들 ‘연출부’의 일을 겪었느니, 스크립터 일을 했을 때 경험이 도움됐다. 이런 식인데…. 이건 너무 상투적이잖아요.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에서 ‘씨다’ 생활 안 하는 사람은 엄친아나 엄친딸 밖에 없지 않나요? – 물론 제 주위의 엄친아들은 다들 씨다 생활 합니다 ㅡ.ㅡ –

관객들이 그나마 궁금할 수 있던 ‘여자라서 힘든 점’을 묻는 이 뻔한 레퍼토리는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했어요. 그만큼 이 나라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사실 제가 ‘여성 감독’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미국 드라마 <ER>의 감독 ‘미미 레더’가 <딥 임팩트>라는 영화를 감독할 때 ‘여성 감독’과 ‘남성 감독’의 시선 차이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거든요.

당시에 <딥 임팩트>는 똑같이 혜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소재로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이 되어버렸어요. 결론은 <아마겟돈>의 승리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저는 <딥 임팩트>가 훨씬 섬세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감동으로 다가왔다는 점이에요.

더군다나 <딥 임팩트> 이전에, ‘미미 레더’가 감독했던 <피스 메이커>는 액션 영화의 감각 또한 ‘여성 감독의 시선’을 씌우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그런데 전 거기에서 하나 더 의문이 들었죠.

시장 논리와 비슷한 것인데, 제가 미미 레더 감독의 이런 ‘시선’을 통한 영화들에 신선한 감각을 느끼면서 즐거워할 수 있지만 과연 ‘다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선택할까라는 의문이 든다는 거죠. 심지어 여성 관객층이 엄청나다 하더라도 흥행성을 비롯하여 영화의 선택에서 이 ‘여성’ 들이 과연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여성 감독의 영화라서 ‘여성 다수’가 공감한다는 건 억측이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무모한 주장? 또 다른 편견?

사실 PIFF 행사에서 ‘여성감독들’이란 주제로 아주담담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여성의 시선’이라는 것이 하나의 독립적일 수 있는 인간의 관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전 거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죠.

남성 감독도 여성만큼 섬세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고, 여성 감독의 이야기가 남성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퍼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고 ‘아~ 여성 감독이라서…’ 라고 잣대를 댄 이야기를 충분히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럼 뭔가요?

장애우 감독이 등장해야만 장애우의 시각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나오나요? 레즈비언 혹은 게이 감독의 영화가 등장해야 ‘제대로 된 시각’을 반영할까요?

또 다시.

결국 소통 이야기로 흘러가는 <은하해방전선> 같은 뻔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우리는 ‘남성중심의 사회’이자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면서 ‘군대의 상하 계급 문화’를 적용시킨 일종의 ‘병영국가’에 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시각’이 새롭게 비치는 것은 그만큼 ‘볼 수 없었던 시선’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비주류’였기 때문이죠.

영화도 똑같은 거예요. 우리 모두 할리우드 키드이자 홍콩 키드죠. 한국 액션 영화가 60년대에 어떤 영광을 누렸든 간에 – 제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팔도사나이나 손가락 7개? 8개만 가지고 액션을 펼쳤던 영웅도 남아있지만 결국 영웅본색과 같은 느와르나 무협영화, 강시영화 아니면 전부 할리우드 영화니까요 – 머릿속에 그동안 보아온 영화가 그런 ‘엄청난 영화들’이었으니 여성 감독들이 뱉어내는 이야기들이 ‘신선’하다고 보이는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뜬금없이 여성 감독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온 것도 아니죠. 그들의 시각이 ‘신선’하다구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관련 주 소비층은 이미 여성이 다수입니다. 20~30대의 여성층이 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죠.

덕분에 여성 감독의 잇뽕도 늘었죠. 이뿐인가요? TV를 비롯해 드라마작가, 구성작가 다수가 여성이에요. 이 여성들이 내뱉어내는 이야기에 남성상이 그려지고 여성상이 그려지고 있어요. 보수적인 – 나쁜 의미의 보수가 아닌 – 남성들은 그런 TV 시스템에 숨막혀 갈 곳을 잃어가고 있지요.

아마 어떤 페미니스트가 보면 기가 찰 겁니다. 아니 아직도 이 사회의 양성 평등은 갈 길이 먼데 무슨 헛 소리냐고.

관객과의 질문대답 시간의 가장 마지막에 제가 물었던 질문의 요지는 딴 게 아니었어요. ‘여성 감독’이라는 주변 시각 때문에 영화감독으로써 이야기를 매만질 때 ‘자체 검열’을 하게 되는 경험이 있는지가 궁금했죠.

임순례 감독의 대답은 참으로 ‘당연하고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어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감독이라면 제작자의 압박이고 나발이고 ‘하고픈 이야기’를 해내야죠.

이건 그러니까 우리의 정체성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어요.

내가 우파인데 자신 있게 우파라고 얘기 못 하는 사람들 – 좌파도 마찬가지 -.

주변 시각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믿는 바를 꺾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까발려 놓고 ‘그렇게 힘들게 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만드는 영화가 ‘여성 감독’의 시선으로 포장되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거예요.

사람은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 동물입니다. 이때의 ‘합리’라는 것은 이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성에 합치하려는’ 것을 말해요. 여성 감독들에게 거는 기대가 남성 중심의 시각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라면 그건 억지스런 주장일 수밖에 없어요. 이미 대다수의 여성 감독을 노려야 하는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씨다’를 거쳐 입뽕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물론 감독들의 말마따나 ‘영화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다고 믿는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내고 이야기 해야 하는 이 사회는 안 그렇다는 거죠. 동떨어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순 없잖아요? 그리고 임순례 감독의 그 섬세한 이야기 밀도를 보세요. 그게 ‘차별’을 안 겪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던가요?

결국 ‘깨어 있는 사람’이 그 마음을 잃지 않고 ‘감독’이 되어야 – 아니 개인적으로 이 나라에서는 ‘제작자’가 되어야 라고 쓰고 싶습니다만 – 하겠지만. 역시나 어려운 일이죠.

그냥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감독이라서 달라’가 아니라 사회의 차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감독. 그 감독의 성별이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결국엔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여성 감독의 영화’로 분류하면 할수록 그건 ‘우리 이야기’로 100% 동화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영진공 함장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왠지 그녀들이 전부 나 같다.


제가 이렇게 펑펑 울다니요. 아줌마가 되어서 설움이 많아졌는지, 눈물이 많아졌는지. 암튼 펑펑 울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서 내 설움에 울고, 너무 안 되었어서 연민에 울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바로 보여지는 핸드볼 경기. 예닐곱살 쯤 된 아이가 경기장으로 달려들어오고, 골키퍼를 보던 수희(조은지)가 당황을 합니다. 미숙(문소리)이 손짓해 아이더러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동료 중 하나가 아이를 데리고 나갑니다. ㅎㅎㅎ 저 이 장면부터 울었어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경기해야 하는 문소리 처지에 울고, 중요한 경기 중에 뛰어드는데도 배려해 주는 동료들 배려에 울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 ‘핸드볼 큰잔치’라는 현수막 위로 텅빈 객석과 터지는 분수불꽃. 울던 참에 더 울었습니다.


‘아줌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도 어느새 저를 ‘아줌마’라고 표현하고 있구요. 가끔 ‘제3의 성’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억척스러운’, ‘앞뒤 분별이 없는’, ‘무식한’, ‘세상물정 어두운’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지요. 저의 스무살 시절.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을 가지고 처음으로 전자기타와 앰프를 사러 낙원상가에 간 날. 부족한 예산에 앰프 값 때문에 고민할 때 악기상 청년이 권한 것이 ‘아줌마 앰프’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상표도 없고, 베이스 건 기타 건 아무 거나 꽂아도 되는 앰프. 그것이 ‘아줌마 앰프’라니 참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가막히게 잘 어울리는 조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바로 아줌마거든요. 이름도 무엇도 없고, 뭐든지 다 하긴 해야 하는 존재.


결혼해서 애를 낳고 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줌마’라는 계급이 됩니다. 경제적 여유가 조금 있건, 없건, 남편에게 사랑을 받건, 못 받건, 대학을 나왔건, 말았건, 직업이 있건, 없건, 그냥 ‘아줌마’가 됩니다. ‘사모님’이라는 약간의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아줌마’는 그 자체로 계급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약간 있는 혜경이나, 빚과 생활고에 쪄든 미숙이나, 불임 때문에 고생하는 정란이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십시오. 세계적인 선수이건 말건, 유명팀의 감독이건 말건, 남편의 사랑을 진하게 받는 국밥집 사모님이건 말건, 다, 그냥, 아줌마입니다. 나도 아줌마가 되어서 그런지 왜 어느 아줌마 하나 짠하지 않은 아줌마가 없습니다. 그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아줌마가 되고 나니 오지랖이 넓어지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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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최고에 올랐건, 금메달리스트이건 간에 그들은 '아줌마'입니다.


미숙. 아이고. 경기 끝나고 어떻게 했을지. 화면 속이라도 들어가서 남편 파산 신청하고, 이혼하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만. 그 또한 쉽지 않겠지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혜경의 처지도 그만그만 이라는 것을 보면요. 전 혜경이 아이와 일본어로 소통하며 안아주는 장면에서도 울었습니다. 아무리 경제력이 있어도, 또 미숙과 달리 챙겨주는 친정엄마가 있어도, 그저 혼자 몸으로 힘들게 애를 키우는 이혼녀일뿐인걸요. 돈 벌겠다고 타지까지 가서 -애 아빠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애를 맡기고 키우느라 자신의 아이와의 소통마저 일본어로 해야하는 그녀의 삶은요. 에효. 구질 구질 애들 키우느라 고생 바가지를 해도, 또 애 안생기는 정란은 이들이 부럽겠지요. 그래도 그들은 정란이 못해본 국가대표 생활을 지겹도록 해 본 이들이고, 그녀가 못 낳은 아이를 하나씩 꿰찬 여자들이니까요. 에효. 대관절 애가 뭣이관데.


근데, 아줌마한테만 그렇게 공감이 가는 게 아닙니다. 어린 선수들부터 낀 세대 수희까지. 그들 안에 제가 있고, 또 저 안에 그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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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 세대 수희. 롤모델도 동기도 없는 그녀가 안 쓰럽습니다.
일단 수희요. 수희는 ‘낀 세대’입니다. 기라성 같은 핸드볼 선수들로 호령하던 왕년의 혜경과 미숙과 같은 세대는 아닙니다. 그들과 같이 뛰어본 경험이 있고, 그들로 부터 배운 세대지요. 그리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장보람과 같은 아랫세대와 뛰어야 하는 세대입니다. ‘대안 없는 골키퍼’라는 수희의 포지션도 참 상징적입니다. 수희는 낀세대라는 것만으로도 ‘롤 모델도 없고, 자신이 롤 모델도 될 수 없는’데, 골키퍼라는 포지션은 그 위상을 더욱 강화합니다. 동기는 필드에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일인자인 것도 아니고. 참으로 막막한 세대입니다.

제가 입사할 때 저희 부문 공채입사자 중 여자는 저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는데, 회사 생활 하면서 느꼈던 그 적적함이 수희를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윗 선배들한테 참 싹싹하게 하면서 진심으로 대하고, 배려심 많은 수희를 보며. ‘그래 니가 나보단 백배 낫다. 수희 화이팅!’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보람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물론 착각이었습니다마는) 입사 초 저는 제가 대단한 인재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고, ‘월급쟁이로 시작을 했으면 별을 따야지’라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야심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갖고 있었습니다. 헌데, 입사하고 보니 현실은 좀 이상했습니다. 제가 입사한 직후, 첫번째 여자 임원이 탄생을 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하지만 얼마 후 녹취록을 작성하러 들어간 임원회의에서 제 우상이 남자임원들에게 완전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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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애들은 근성이 없어 vs 선배처럼 살기는 싫어요

으로 밟히는 것을 보고는 거의 절망을 했지요. 그녀의 평소의 고군분투는 내가 꿈꾸는 임원의 모습과 달리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도 알아버렸구요. 왁왁대는 김혜경과 애나 끌고 다니는 한심한 미숙을 보았을 때의 그녀의 심정을 알것만 같습니다. “요새 누가 맞으면서 운동해요?”라는 보람의 말도 저는 가슴 절절히 이해가 됩니다. 회사에서 꽤 자리잡고,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찬찬히 보면 ‘여성성을 완전히 버린 선배’ ,’아첨과 아부가 남자들보다 더 완벽하게 자리잡은 선배’, ‘나 몸하나 망가지는 것 쯤은 신경쓰지 않는 완전 희생형 선배’, ‘후배들 등쳐서 치고 빠지는 선배’들이어서 그 누구도 롤모델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정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불러서 밥을 사주며,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라’라며 코치해 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아니오 선배. 저는 그렇게 까지 해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라고 외쳤었습니다. 비주류로 마이너로 취급받으면서도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그 선배들에 비해,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주류로 인정해 주는 가운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저를 ‘요샛것들은 근성이 없어.’라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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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세대 보다 못한 불안한 뒷세대

현자나 진주의 아줌마 선수들을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모습도 저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 갓지난 아이를 데리고 혼자 기차를 타고 시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기차안에서 아이가 빽빽 울어대고 내가 어쩔 줄 몰라 당황을 하면, 안쓰러워 도와주는 것은 같은 처지의 애엄마들이고, 무관심한 것은 남자들이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은 곱고 예쁜 처자들입니다. 애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을 때, ‘애 있으면 다니지 말지’라며 싸가지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사람들은 여고생, 여대생, 젊은 20대 초반 여성들입니다.
저는 속으로 “너는 아줌마 안 될줄 아냐?” 하고 욕했지만, 나중엔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나는 저렇게 되기 싫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애기 단속시키는데 애초의 자기의 일이 아닌 남자들이야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약간 불쾌해도 참고 마는 것을 거구요. 간신히 엔트리에 들어와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현자와 진주 앞에 나타난 아줌마 트리오가 반가울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데, 사는 모습을 보자니 형편없고, 그런데 자신들은 그들보다 실력조차 못하니까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들 보다 더 암담한 자신의 미래가 떠오지 않았을까요. 한번도 일인자였던 적이 없는 저는 왠지 현자와 진주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모든 여자가 다 나 같습니다. 다 이해를 할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제겐 너무 완벽한 영화입니다. 미장센이건, 스포츠 장면의 박진감이 부족하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모든 여성의 삶이 박진감 넘치게 보여진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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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한번만 힘빼고 좀 울어주지...울어도 괜찮아.

다만, 저도 엔딩장면 하나만큼은 이렇게 되었었더라면… 하고 욕심을 내 봅니다. 저는 ‘지더라도 울지 않는 거다’라고 말했던 안승필이, 그 잘난척 하던 면상을 가지고 오히려 여자 선수들보다 더 펑펑 우는 것으로 엔딩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미숙을, 혜경을, 보람을, 현자를 끌어안고 더 서럽게 무릎꿇고 엉엉 울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원하는 남자들과의 화해와 소통의 방식입니다. ‘우리 울지 않기로 했잖아요’라며 잘난 척을 떠는 것이 본래 못난 남자들의 속성이라 해도 말입니다.


열라 어렵게 영화 보고 몇자 썼네요.
원래는 TV나 보는 아줌마
영진공 라이

임순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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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낀 제목, 그러나 어울리는.


작년 초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시나리오 상의 영화는 지금 완성된 영화와는 아주 약간 뉘앙스가 달랐습니다. 내용도 거의 다르지 않고 현재 홍보 역시 ‘아줌마’를 키워드로 잡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시나리오로 읽었던 영화는 좀더 ‘막장 인생의 마지막 비상의 화려함’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승부와 상관없이, 나도 가치있는 인간이며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달까요. 완성된 영화 역시 이것을 강조합니다만, 그보다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승부차기 골에 실패하고 승부가 결정된 순간 아쉬워하며 주저앉고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들의 모습 때문인지, 죽도록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하는 비장미 쪽이 더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실 시나리오 상으로는, 미숙(문소리)이 승부차기를 막 던지고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은 채 막바로 무지화면에 “이 날 핸드볼 팀은 결국 은메달을 땄다”는 자막이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돼 있었습니다. 그 시나리오에 그토록 흥분하며 눈물을 쏟았던 것도 바로 그 엔딩 때문이었는데, 전 지금도 이 엔딩이 지금의 엔딩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 대중영화로서 그리 친절한 엔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델마와 루이스> 같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에서도 영화사에 길이 남는 특별한 엔딩을 본 적이 있는걸요. 이 영화가 그 앞에서 계속 고양시켜 왔던 흥분은 이기느냐 지느냐, 전세계 최고가 되느냐, 금메달을 따느냐를 이미 초월한 것이었고, 안승필(엄태웅)도 힘주어 말하듯 이기든 지든 그 순간은 그들에게 ‘최고의 순간’이라 붙여도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투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전 정말로 이 영화가, 우석훈 박사의 논의를 빌면 누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었던 X세대에 속하면서도 ‘여성’이기에 혹은 대졸이 아니기에 이미 88만원 세대보다 일찍부터 88만원 세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지금의 30대 초중반 여성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또 그들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술자리에서 뵌 심재명 대표에게 흥분해서 ‘이 영화의 존재가 너무 고맙다’고까지 말을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오히려 패배감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게 현실이지 않냐고요? 하지만 같은 패배라도 장엄하고 숭고한 패배가 있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패배가 있는 법입니다. 패배의 역사를 오히려 승리로 전화시켰던 <판의 미로>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노동계급을 위한 판타지’라는 건 그저 우울하고 절망적인 패배도, 손쉽고 ‘우기기’에 불과한 승리도 아닌, 이렇게 당당하게 근거를 가진 아름다운 패배의 승리로 수놓아져야 마땅합니다. 가장 모범적인 예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저 하늘 높이 비상하고, 형과 아버지가 객석에서 눈물어린 박수를 치는 마지막 장면이며, 위에서도 언급했듯 <델마와 루이스>의 아름다운 우정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뭐, 시나리오 상의 설정은 실제 영화를 찍으면서 바뀌기 마련인 거고, ‘책’ 상태를 가지고 지금의 영화가 어때야 했다 저때야 했다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한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과 화합입니다. 우리는 크게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의 갈등, 혜경과 승필의 갈등, 그리고 노땅그룹과 신진그룹의 갈등을 목격하며, 비인기 종목이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당연히 메달 따와야 하는 종목인 핸드볼을 하는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환경의 갈등을 봅니다. 미숙과 혜경, 혜경과 승필을 잡는 카메라는 매우 고집스럽게도 각 인물들을 각각의 프레임에 가둡니다. 바닥을 닦고 있던 혜경과, 승필로부터 혜경이 돈을 마련해준 것이란 사실을 듣고 혜경에게 온 미숙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 두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잡는 컷이 없습니다. 한 컷에 한 인물씩 장면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들이 비로소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잡히는 건, ‘가출했던’ 미숙이 다시 선수촌에 돌아와 혜경과 훈련을 같이 하는 장면부터입니다. 혜경과 승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선수촌을 나가는 혜경을 잡기 위해 왔으면서도 잡는 말을 못 하는 승필과 혜경을 차 안에서 함께 잡는 씬이, 비로소 처음으로 두 인물을 한 화면에 잡는 장면입니다. 이런 식의 구성 방식은 분명 각 인물의 고립감과 고독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컷과 컷이 매우 단조롭다는 느낌, 그리고 화면 안이 상당히 비어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문소리와 김정은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런 단독 컷들을 다 채울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각자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이런 프레임이 과연 좋은 프레임인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이 씬 구성에 굉장히 놀랐어요. 너무 어설퍼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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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임순례 감독은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추락하는 인물들을 통해 더없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풀어냈지만, 그가 정말로 재능이 있는 분야는 코미디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애초 그를 주목받게 해주었던 단편 <우중산책>에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만든 단편 <그녀의 무게>(인권영화인 <여섯 개의 시선>에 수록돼 있습니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남자였고, <우중산책>과 <그녀의 무게>의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건 단순히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성별이 가지는 섬세함과 디테일함의 표현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애초 장르 자체가 코미디인 건 아니지만 영화 내내 굉장히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웃음을 안겨주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의 그 생동감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합의 드라마에 대한 낙천적인 시선의 디테일 묘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임순례 감독은, 여성을 묘사하는 데에 더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한다는 얘기지요. 사실 같은 영화 안에서도 승필에 대한 묘사는 좀 상투적인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신진그룹 선수 중 하나가 “지들끼리 다 해먹으라 그래”라는 대사를 하는데, 저는 이게 무척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미숙과 혜경이니 만큼, 우리는 ‘노장의 나이에도 열심히 뛰며 심지어 젊은 선수들을 압도해버리는’ 그녀들에게 손쉽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만, 미숙과 혜경의 존재는 한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야 할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미숙과 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생활을, 경력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암울한 현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노련함과 연륜으로 젊은 선수들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신진 선수들을 휘어잡는 것을 무턱대고 응원만 하기엔 마음 한 구석이 어두운 것도 사실이네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미숙과 혜경의 사정 역시 매우 절박합니다만, 이것이 젊은 선수들의 앞길을 막고 뺏으면서까지 해결돼야 하고 응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를 화두로 잡게 된 저로서는, 특히 감독대행에서 곧장 선수로 다시 위치를 바꾸는 혜경의 선택이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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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이 맞닿은’ 게 진짜 뽀인트. 핸드볼은 단체경기라니깐요.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마지막 결승전이네요. 전 당황스러웠던 게, 이 영화가 본경기가 끝났고, 동점 상태에서 첫 번째 연장전,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두 번째 연장전, 그리고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승부차기로 가는 그 긴박감과 박진감이 완전히 지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 전반전인지 후반전인지, 첫 번째 연장전인지 두 번째 연장전인지, 아나운서의 해설 멘트를 통해 정보를 주는 건 매우 진부한 수법이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긴장감을 계속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는 코트 안에서 선수들을 따라잡는 데에 바빠서 그런 식의 정보를 그리 명확히 주고 있지 못하고, 응당 필요한 긴박감 조성에도 실패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예정돼 있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기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설마 영화를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 경기를 모두 TV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승패와 화려한 경기보다 각 캐릭터들의 감정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그 감정의 스펙터클 역시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을 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역시 장면 구성에 있어 실패한 씬이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제발 ‘흥행감독 임감독’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빌었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진 듯합니다만, 뭐랄까, 임순례 감독의 굉장한 강점과 매력을, 한계와 함께 봐버린 듯해서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근간에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응원과 지지를 받아야 할 영화라는 사실은 여전합니다. 이 영화가 시도한 새로운 도전들과 그 도전들을 감내한 용기들(여러 모로 ‘장사 안 될’ 소재들을 갖고 보편적인 감동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이 영화는 선취해 내고 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