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


 


 


 


 


 


 


 


 


 


 


 


 


 


 


 


 


 


 


 


 


 


 


 


 


 


 


 


 


 


 


 


 


 


 

<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1부]

 

 


 


 


 



 


 


 



2009년에 우연히 접했던 뱀파이어 로맨틱 탐정물 <문라이트>의 리뷰로 시작했다가, 곧 뱀파이어물 이것저것을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뱀파이어물에 대한 메타적인 분석글’을 지향하며 야심차게 전개하…다 흐지부지된 글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시간적 한계가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럭저럭 재미있습니다. 제 글이 재미있다기보다는(뭐 저는 그렇다고도 생각합니다만 -.-), 뱀파이어물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 때문이겠죠. 한편으로는, 2000년대 초반과 중반의 획기적인 ‘뱀파이어물의 진화’의 양상은 다소 주춤한 대신, 그 진화를 시리즈물을 통해 ‘유지’하는 데에 더 주력하는 분위기인 듯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일부분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뒤늦게나마 공개합니다.


 


장르물에 지식이 일천한지라 곳곳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댓글이나 트랙백으로 지적해 주시면 감사히 받고 수정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1. <문라이트 Moonlight>는 어떤 시리즈인가


 


<트와일라잇>이 ‘새로운 뱀파이어’ 얘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대 도시 안의 뱀파이어를 좀더 매력적이고 시크하게 표현한 걸로 미국 TV 시리즈 <문라이트>가 있다. 비록 쇼 러너가 넷이나 되는 바람에 그리 나쁘지 않은 시청율에도 시즌 1로 끝나버린 비운의 드라마긴 하지만.


 


호주 출신의 알렉스 오로클린(그러나 국내 인터넷에서는 ‘알렉스 오로린’으로 통용되는)과 영국 출신의 주목할 만한 젊은 연기파 배우 소피아 마일즈, 거기에 <기사 윌리엄>이나 <40 데이즈 40 나잇> 등에 나왔던 독특한 매력의 섀니언 소서몬이 주연을 맡았다.


 


사립탐정과 인터넷 기자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명목상 탐정물. 그러나 실질적으론 간질간질하지만 지나치게 손발이 오그라들지는 않은, 꽤 괜찮은 로맨틱 뱀파이어물이다.


 


알렉스 오로클린과 소피아 마일즈가 워낙 괜찮은 배우들인데다 둘 사이 케미스트리도 매우 좋았다. 여직도 시즌 2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여성팬들이 전세계에 많은데, 알렉스 오로클린은 <하와이 5-0>의 주연으로 자리를 잡아 버렸으니 <문라이트>의 2시즌 제작은 당분간 물 건너간 셈이다.


 


 


 



Moonlight

<문라이트>의 두 주인공, 알렉스 오로클린(오른쪽)과 소피아 마일즈


 


 


 


<문라이트> 시리즈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뱀파이어물에 그 분장이 꽤 요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설정들은 제법 쿨하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역시 뱀파이어 탐정물인 <블러드 타이즈>가 각종 악마와 저주와 주문 등등을 요란하게 다루는 것과 달리, <문라이트>에서는 초현실적 존재로 오직 뱀파이어만이 등장하고, 뱀파이어도 감각 예민하고 일반 인간들 기준으로는 괴력과 초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도시 정도라면 햇볕 아래에서도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전통적인 방법 중 하나로 알려진 ‘심장에 말뚝박기’도 이 시리즈에서는 ‘뱀파이어를 마비만 시킬 뿐 죽일 수는 없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2. 넘쳐나는 새로운 뱀파이어물


 


그러고 보면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만들었다는 게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 요 몇 년간 서양은 확실히 이런 새로운 뱀파이어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있는 중이다.


 


<트루 블러드>는 골든글로브에서 안나 파퀸에게 TV시리즈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CBS에서는 <뱀파이어 일기>라는 새로운 시리즈가 론칭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던 <문라이트>도, 캐나다에서 제작된 <블러드타이즈>도 모두 국내에서 케이블을 통해 소개되었다. 영화 쪽으로 가면 물론 <트와일라잇>이 있고, 이것의 속편 <뉴문>과 <렛미인>이 뒤를 이었다.


 


15년 전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처단할 존재로 전제하고 영혼을 가진 뱀파이어 ‘엔젤’을 저주에 걸린 예외의 타자로 상정했던 것과 달리, 근간의 뱀파이어물은 보다 적극적으로 뱀파이어를 매력적인 이존재로, 도시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자’로 그린다.


 


 


 



 


 


 


또한 전통적으로 알려진 뱀파이어에 관한 여러 가지 신화들을 오히려 ‘뱀파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퍼뜨린 루머’로 역이용하는 재치도 보인다. 단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 ‘십자가를 무서워한다’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최근의 여러 뱀파이어물은 공통적으로, 이것들이 뱀파이어들이 일반사람인 척하기 위해 일부러 뿌린 잘못된 루머라고 주장한다. 마늘도 취향의 문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다른 신화들에 대해서는 시리즈마다 이견이 있다. <문라이트>에서 뱀파이어들이 햇빛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진 않은 걸로 표현하고 있지만 <트루 블러드>나 <블러드 타이즈>는 여전히 햇빛이 뱀파이어에 치명적이라 주장한다. 다만 <트루 블러드>의 경우 과거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스티브 모이어가 연기하는 주인공 뱀파이어 빌 콤튼은 1시즌 마지막회에서 연인인 수키(안나 파퀸)를 구하기 위해 대낮에 나왔다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쓰러지기는 하지만 목숨은 부지한다.


 


뱀파이어물이 이토록 급증하고 더욱이 과거와 달리 뱀파이어를 매혹적인 이방인 정도로 그려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일반화되면서 그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시골에서 폐쇄적 생활을 하는 지주, 유지로 설정되며 근대 이전의 귀족을 상징했다면, 이후 불야성의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도시물이 활기를 띄었다가 지금은 도시물과 시골물이 공존하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현대의 뱀파이어물은 아무래도 도시가 어울린다. 도시야말로 바로 옆동네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는 데다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올빼미족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시골물은 과거 시골에 은둔하는 지주나 지방 유지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골에 새로이 보금자리를 틀러 온 타지 출신 정도로 묘사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깡촌, 그러니까 촌스러운 시골 백인들을 가리키는 ‘힐빌리’ 혹은 ‘레드넥’들만 살던 동네에도 이젠 유색인종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게다.


 


 


 



 


 


<트와일라잇>만 해도 배경은 분명 워싱턴 주의 시골 깡촌인데 인종 분포는 LA의 웬만한 동네 못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다. 전형적인 북구 미남들부터 네이티브 어메리칸은 물론, 심지어 동양인들까지. <트루 블러드>의 배경도 루이지애나 주의 깡촌 시골이다.


 


그러니까 봉건시대의 잔재에 대한 더없이 적절한 비유였던 뱀파이어가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에 와서는 도시의 여피를 상징하거나, 시골로 낙향한 부유한 도시 출신 백인, 혹은 미국 정착에 성공한 흑인 외 다종다양한 유색인종들의 비유로 그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저 할리퀸 로맨스 수준이었던 원작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의 작가 앨런 볼의 손을 거친 <트루 블러드>가 종교적 광기와 이종존재간 문화충돌, 카트리나 이후의 미국 남부의 트라우마를 다루며 6, 70년대 반문화적 성격까지 차용해와 복잡한 문화지도를 그리고 있는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자본론]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의 훌륭한 통찰과 비유도 이제는 시대적 효력을 살짝 상실했다는 얘기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노바리


 


 


 


 


 


 


 


 


 


 


 


 


 


 


 


 


 


 


 


 


 


 


 


 


 


 


 


 


 


 


 


 

스파이더맨의 심리를 분석해보자!

 

 


 


 



 


 


“스파이더맨”은 한 마디로 성장드라마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위 철없는 청소년이 거대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파이더맨은 ‘유전자 변이된 거미’라는 로또 복권에 당첨된 왕따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청소년은 평소에 인기도 없고 집도 가난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붙여본 적 없는 왕따였죠. 그는 그런 자기 모습이 아주 싫었을 겁니다. 그런데 거미에게 물린 덕분에 정말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거예요. 문제는 그 행운이 너무 거대하다는 겁니다. 마치 거액 복권당첨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릅니다. 로또 당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당첨된 사실을 알리자니 그것도 불안하고(여기저기서 도와달라 손을 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숨기고 있자니 지금 처한 꿀꿀한 상황을 계속 참아내야 하고.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 힘을 사용해야 할 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진 스파이더맨의 성격은 이상주의와 낙관성인데, 이것 역시 청소년기의 특성입니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마음 한구석에 이 세상에 정의는 살아있으며 모두가 조금씩 노력한다면 세상은 그 정의에 한걸음씩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런 희망 때문에 그만큼 쉽게 좌절하고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관심이 많고 직접 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모두들 마음속은 스파이더맨과 비슷한 것이죠.


 


 


 



 


 


 


스파이더맨이 처음 접하는 중압감은 막대한 힘에 따르는 책임감이 아닙니다. 우선은 자기에게 생긴 비밀이 주는 부담감이 먼저죠. 그는 부모처럼 지내던 삼촌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힐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춘기에 일어나는 신체적인 변화(이차성징)와 호르몬의 균형이 바뀌면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나 욕망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을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말할 수 없으니 혼자 간직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나’라는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부모나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개인으로 태어나는 거죠. 루소가 말한 제2의 탄생이나 청년심리학자 ‘홀링워스’가 말하는 심리적 이유기인 것이죠.


 


그렇다면 심리적인 요인은 능력발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스트레스는 특히 중추신경계의 작용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섬세한 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속도를 다루는 수영 경기나 섬세한 호흡에 의존하는 사격, 타이밍이나 타격점에 의해 좌우되는 골프, 야구 같은 경기에서 선수들의 능력도 스트레스에 의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지요. 그런데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역시 경기력은 떨어집니다. 적당한 긴장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스트레스나 긴장이 경기력(혹은 여러 가지 수행performance)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역 U자형 그래프를 그리죠. 이를 여키즈-도슨 법칙(Yerkes-Dodson law)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2 편에서 피터가 갑자기 능력을 잃어버리는 장면은 청소년기의 불안정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청소년기에는 팔다리의 길이나 체중이 갑자기 늘어나기 때문에 예전에는 잘 하던 운동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키가 커버리면 오르내리던 계단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는 일을 겪게 됩니다. 그제서야 자기가 평소에는 아무생각 없이 숨쉬는 것처럼 하던 일이 의외로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곤 하지요. 게다가 감정의 변화도 커서 어느 날은 우울하다가 갑자기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화를 내다가 온순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정한 것이 청소년기입니다.


 


 


 



 


 


 


[뽀나스]


아이언맨은 우울증환자에 가깝습니다.


남자들은 대개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기어들어가는데 아이언맨 수트는 최첨단 동굴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아이언맨이 어떤 상처를 입었냐고요? 토니 스타크의 상징 자체가 뻥뚫린 가슴 아닙니까. 텅빈 가슴을 기계심장으로 채워넣은 남자가 토니죠.


 


어쨌든 다른 수퍼영웅들은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던가 태생이 다르던가, 혹은 사고가 있었던가 하는데 토니스타크는 그 좋은 머리와 엄청난 재산을 활용하여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아이언맨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병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진공 짱가


 


 


 


 


 


 


 


 


 


 


 


 


 


 


 


 


 


 


 


 


 


 


 


 


 


 


 


 


 


 


 


 


 


 

“폭스파이어” (Foxfire), 영화 속 음악들의 의미


 

 


 


 



 


 


“폭스파이어” (2012, 원제: Foxfire, Confessions of a Girl Gang)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의 시작점은 195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전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패권국가가 된 것이죠. 이 시대는 동시에 냉전의 개막기이기도 했습니다.


 


냉전 … 다들 잘 알고 계시는 매카시즘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풍요와 매카시즘의 결합된 오묘하게 풍요로운 시절의 어린 아이들은 공산주의와의 전쟁을 울부짖는 어른들에게 별반 흥미가 없었죠. 그 때 등장하는 게 록큰롤입니다.


 


많은 록큰롤 가수들이 젊은이들의 추앙 속에 “매카시즘? 몰라! 씨바 오늘밤은 여자랑 밤새 술 마시고 춤추고 침대서 구를 거야”를 외치죠. 그러다가 된통 얻어맞기도 하고요.


 


잘 알려진 록큰롤 스타들은 10대 여성 강간(근데 나중에 둘이 결혼해요), 10대 성매수 등등으로 감방 신세를 지게되죠. Little Richard, Chuck Berry 가 그렇죠. 물론 Elvis는 재빨리 어른들 눈치 보면서 자원입대 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큰롤은 청년문화, 저항의 상징이 됩니다. 지금까지도 그 이미지는 계속되고 있죠. 록이 저항의 아이콘이 된 건 다 이 때 형들의 공입니다. 엘비스가 한국에선 로큰롤 스타지만, 미국에서는 초기에 분명 록큰롤이지만, 로큰롤보다 결국 팝의 제왕으로 불리는 이유도 이 형은 타협했기 때문이죠. 덕분에 누나팬들은 더 많아졌겠지만.


 


 



Timber Timbre, “Woman”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1950년대 여성이 얼마나 억압된 존재였는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런 틀을 깨고자 나선 아가씨들의 맹랑한 저항의 파국을 그린 이 영화에선 우리가 놓치고 있던 로큰롤의 남성성을 거칠게 들고 나옵니다. 물론 영화에 이런 내용이 직접 거론되진 않죠. 오히려 1950년대라는 시대상을 보여주기 위해 로큰롤이 쓰입니다. 그런데, 그게 영화의 내용과 겹쳐지면서 은근히 까입니다.


 


영화의 스코어는 Timber Timbre라는 프로젝트 팀이 맡았습니다. 캐나다의 포크 블루스 프로젝트죠. 중요한 장면들의 스코어와 스크롤과 함께 나오는 음울한, 새로 쓴 곡 같은데, 옛날노래 같은 “Where Are You Going, Where Have You Been?”이 이들의 노래에요. 관심있는 분들은 앨범도 몇 장 발매되어 있으니 유튜브 검색하시구요.


 


스코어보다 중요한 게 영화에 나오는 로큰롤과 그녀들이 부르는 노래에요. 시대에 맞게 라디오에선 로큰롤이 나옵니다. Johnny Carroll, Rosco Gordon, Angie & The Citations, Bobbie & Boobie 같은, 지금은 로큰롤의 원조로 불리는 형아들이죠.


 


스포주의: 보시려면 드랙하세요 –>  (중요한 장면이 있어요. 학교에서 백치로 통하는 리타가 껄렁한 남동생 놀러 가는데 따라갔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죠.) 리타 엄마도 리타의 옷을 보고 여자 행실이 이게 뭐냐는 식으로 힐난하죠. 그런 시대예요. 그리고 그 껄렁한 망할 놈들이 소위 야전에서 틀어놓고 있는 게, 이 형아들 노래죠.


 


 



Carmen Miranda, “ Mamãe Eu Quero”



 


물론 소녀들의 파티에도 Johnny Carroll의 ‘Wild Wild Women’이 나오긴 합니다. 근데, 좀 놀라운 건 그녀들끼리 놀 때 스스로 부르는 노래에요. 물랑루즈나 1930, 40년대 여성성을 마구 자랑하는, 혹은 관능적인 모습을 자랑하는 노래죠. 그것도 철저하게 남성적인 시각에서 섹시한 노래들이란 거에요.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섹시하고 귀여운 여성으로 당시 남성들에게 만만한 여성상으로 비쳐졌던 카르멘 미란다 누님의 노래를 부르는거죠. 이런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을 바라보는 리더 레즈(Legs)의 시선이 묘하죠. 웃고 있는데, 어딘가 씁쓸한.


 


결국 풍요의 시대는 남성과 마초의 시대였다는 거죠. 남자 어른은 매카시즘으로, 어린 남자놈들은 로큰롤로 섹스 얘기할 때, 여성들은 부르주아건 워킹 클래스건, 나이 많건 적건 여전히 거기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레즈는 밖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봐요.


 


이 작품은 로랑 캉테 감독의 평타라고 하는데, 최소한 음악의 사용에 있어선 시니컬한 시선의 극치였다고 봅니다.


 


 


영진공 헤비죠


 


 


 


 


 


 


 


 


 


 


 


 


 


 


 


 


 


 


 


 


 


 


 


 


 


 


 


 


 


 


 


 


 


 


 

“설국열차”, 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신세계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즉시 뒷칸으로 돌아가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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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해서 좋다는 얘기, 싫다는 얘기,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 등을 다 듣고 난 뒤에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이 영화가 최근 몇 년새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만하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허나 이런 나의 평가는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독이 심어놓은 철학에 대한 것이어서, 소위 영화적 완성도라든가 관객과의 소통방식이라든가의 요소에 있어서는 최고가 아니라 지적해도 그닥 반박할 생각은 없다.


 


영화가 좋다고는 평가를 하지만 사실 관객이 왜 이렇게 많이들 보러 오시는지는 아리송하다. 캐릭터가 뜬금없기도 하고 전개의 개연성이 없는 장면도 많고 무엇보다 결론에 대한 모호함이 관객 동원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리송하든 대단하든 일단 “설국열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영화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나르는 신발짝’


2008년 이라크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이라크 출신 기자가 저항의 의미로 신발을 집어 던진 적이 있다.


 


 


 


1. 다 죽어야 산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다 죽는다. 왜 그래야 했을까?


 


편의상 열차 안에서 업악받고 있는 꼬리칸 쪽을 좋은 편이라고 하고 체제를 장악하여 조정하는 쪽을 나쁜 편이라고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느 쪽에 있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쁜 건지 무척 헷갈리게 된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인 거다.  결국 중간에 희생당한 사람들만 불쌍한 거다.


 


그리고 좋은 편이 죽어서 더 애틋하다거나 나쁜 편이 죽는다고 해서 통쾌하다거나 하질 않는다.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거창한 명분이나 맥락도 없이 뜸들이지도 않고 그냥 죽임을 당한다.


 


그간 많이 보아온 영화처럼 하자면 … 거대한 악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정당하지만 나약한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짜릿한 죽음과 숭고한 죽음이 대비되면서 관객이 관람하기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좋은 편이 승리하여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든지 아니면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관객들에게 의문점과 고민을 안겨주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거 없다. 그냥 다 죽는다. 그리고 그게 옳다.


 


영웅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이나 악당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 모두 다 이미 체제 안에서 순이든 역이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주어진 에너지와 윤리 한계치를 다 지나치게 오버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전개에 적합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 퇴행의 힘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대단히 수고하셨지만 이제 그만 안녕~


 


 


 



미안하다 … 다 안녕이다 … 한 명만 빼고


 


 


 


커티스가 메이슨을 잡기 위해 에드가를 포기하는 장면을 보자. 아무리 반란의 목적을 위해 절실했다 하여도 커티스는 에드가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거다.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란의 선봉장으로 다시 날 수 있었던 동기가 바로 에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커티스는 대의를 위해 사람을 버린 죄를 저지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커티스는 에드가를 구하러 달려 갔을 것이다. 그래도 에드가는 죽었을 것이고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가 오히려 커티스를 더 달구어내 결국엔 어떻게든 메이슨을 잡고 복수의 행보를 가열차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모두들 커티스에게 전자를 요구할 것이다. 겉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메이슨을 잡기를 바랄 것이다. 후에 비인간적이지만 대의를 이끄는 냉철한 지도자로서 어쩔수 없었노라고 합리화 될 터이고.


 


후자의 커티스는 어떨까?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결국엔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리더가 될 수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대의를 좇아 사람을 버린 커티스든, 대의를 저버리고 사람의 정을 좇은 커티스든 자신의 역할이 마무리되면 어떻게든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다 사라져야 새 세상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봉감독의 의도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나의 오역으로 인한 자뻑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메시지가 있든 없든 옳든 그르든 그걸 결정하는 건 매우 당연하게도 순전히 관객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2. 플랜 같은 거 있기? 없기?


 


따지고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모하고 생각 없는 인물은 주인공 커티스다.


 


그에게는 계획도 없고 정보도 없고 플랜B도 없다. 눈 앞에 보이는 한 가지 장애물 제거에만 온 신경을 쓸 뿐 애시당초 정체모를 소스가 보내주는 쪽지에 모든 상황판단을 의지하고, 물론 길리엄이 부추겼지만, 앞으로 가서 뭘 어떡해야 겠다는 목표도 없다.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일단 가는 거다. 가서 뭘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다. 거기에는 여기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테니 거기가서 … 아 잠깐만 … 그 다음엔 뭘 해야지? … 그래! 그거야! 윌포드를 처단하고 엔진을 점령하고 그리고 … 그리고 …


 


아예 플랜이 없다. 있다면 그저 길리엄을 지도자로 옹립한다는 거. 그외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얻고 그걸 어떻게 활용하고 그리고 일정 지점에서 협상을 시작할지 더 나갈지 판단하고 뭐 이런 거 없는 거다 … 오로지 진격이다 … 나를 따르라!


 


어 그런데 또 잠깐 … 진격을 계속 하려면 앞칸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보안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 그러니 그에게 가자  우르르 … 이게 뭐하자는 건가 지금 ….


 


 


 



여기 송강호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계신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빼앗긴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나서서 싸우는 거는 너무도 당연하고 옳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왜 계획을 안 세우냐고? 최소한의 준비는 왜 안 하는 건데, 분노만 쌓아 올릴뿐 … 뒤를 따르는 많은 이들 모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거사를 하면서 왜 배수의 진으로 덤비는 건데, 안되면 다 죽자는 거야? 무슨 불사파야?


 


그래, 너무도 힘이 열세이고 전혀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계획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냐 하겠지.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도 되지 않을까. 여건의 변화를 유도해내면서 말이야. 한 칸 앞으로 가서 버티고 협상하고 또 한 칸 앞으로 더 나가서 협상하고 이렇게 말이다.


 


뭘 하더라도 사전에 최소한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은 가지고 가야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일단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언젠가는 이기고 성공하려면 그 시점에서 주어진 조건을 살펴보고 계획을 세우는 정도는 해야 한다 … 이보시오 커티스씨,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문부터 따기 전에 일단 의견수렴과 대책강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


 


 


 


3.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다.


 


윌포드와 길리엄에게는 계획이 있다.


 


균형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 둘은 열차 내에 주기적으로 축적되는 역기능의 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간단하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74%에 맞춰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려면 꼬리칸이 도발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도발을 용인할 수 있는 한도와 도발이 닿아서는 안되는 칸을 정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자, 이제 거사의 날이 왔다. 덤벼라.


감옥칸, OK … 식량배급칸, 괜찮아 … 윌포드는 이때까지는 실탄이 없는 경찰력으로 대처를 하며 밀리는 척한다.


 


최악의 경우에 용인할 수 있는 한도는 용수칸까지 이다. 그래 용케 여기까지 왔군 … 이제 윌포드는 새로운 폭력을 동원하여 애초의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


 


그건 바로 도끼와 칼을 든 용역깡패의 투입이다. 영혼이 없는 맹목적인 이 놈들은 눈마저 가리워져 있다. 무자비하게 살육을 시작한다. 길리엄과 윌포드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의외의 동력이 나타난다. 횃불이다! 꼬리칸에서부터 피워올려진 횃불의 엄청난 포스에 힘입어 커티스는 용수칸을 장악하고 거물급 인물을 포획하게 된다. 물론 커다란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이쯤에서 계획이 틀어지게 된 길리엄은 말린다. 커티스는 가려고 한다. 그러자 길리엄은 뒤로 빠진다. 윌포드를 만나거든 입도 열기 전에 즉시 없애달라고 당부하면서.


 


당황한 윌포드는 밀리기 시작한다. 화원, 과수원, 수족관, 스시집까지 내주고 마침내는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칸까지 커티스의 진입을 허용하고 만다.


 


학교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체제의 우월성과 충성심을 주입하고 체제에 거역하면 보복당하고 체제에 순종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가르쳐 체제를 온존케하는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됩니다른이름으로 저장 …


 


 


 


윌포드는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최후의 보루인 가장 강력한 무력을 투입한다. 군대다.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기위해서 학교선생님까지 직접 손에 총을 들고 갈겨댄다.


 


결국 꼬리칸은 속절없이 밀리고 밀려 장악되고 선두는 고립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지도부는 내쳐 달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반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엔진룸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윌포드가 애초에 꾀했던 ‘균형유지’는 실행이 되고 …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의외로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단계적 플랜이 있다. 그들이 원래 똑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내주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불의한 체제를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그들의 시나리오와 단계 설정 정도는 카피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점프 한 방으로 다 뛰어 넘으려는게 과연 현명한 접근일까.


 


 


 


4.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순환고리를 …


 


꼬리칸은 버려진, 쓸모없는 잉여 공간이 아니다. 꼬리칸이 필요 없었으면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예전에 벌써 처치해 버렸을 터이다.


 


사실 이 열차 안에서 꼬리칸은 앞칸의 특권층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꼬리칸이 없으면 앞칸은 그들의 속성상 그 안에서 다시 지배와 피지배를 만들어 내게 돼있다. 그렇게 반복이 되면 결국의 그들의 앙상레짐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그러기에 윌포드는 꼬리칸이 멸망방지장치라는 걸 잘 알고있다.


 


그리고 길리엄도 그걸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윌포드도 길리엄도 다 이유가 있고 자기 변호가 가능하다.


 


꼬리칸은 원래 가진 게 없어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거든, 그렇다면 쾌적한 열차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 …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지도 않잖아, 재능이 있으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앞칸으로 갈 수가 있어, 그런데 뭔 불만이 그리 많아, 쯧쯧쯧 …


 


앞칸은 가진게 많아서 그걸 다 쓰지도 못하고 죽어, 그런데 절대 남과 나누려고는 하지 않아 … 그게 인간의 본성인가봐, 우리 꼬리칸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자고 … 저 더러운 권력따위 필요하지 않아 … 팔, 다리가 잘리더라도 숭고하고 의롭게 살면 거기가 나만의 낙원인 거지, 허허허 …


 


 


 



윌포드가 어린 시절 즐겨 읽으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는 만화


 


 


 


커티스여도 좋고 커티스가 아니여도 좋다. 엔진룸에 가서 윌포드를 처단하고 나서는 어차피 자신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고 자애로운 지도자가 되어보자. 권력을 다 나누어주고 자원을 다 공유하고 뭐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그러면 모든 이들이 스스로 현명하게 나누고 절제하며 동참하여 열차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게 될까.


 


주어진 공간, 한정된 자원에 비추어 분명히 열차는 관리가 필요하다. 집단지도부를 형성하면 그게 될까. 그렇다고해도 역기능의 여분은 어떻게든 조치가 필요하다. 도대체 누가 그걸 정하고 누가 조치되어져야 하나.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결국 다시 이전 체제가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속하는 사람은 바뀌겠지만 꼬리칸은 다시 생길 거고 특권층 또한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또 제2, 제3의 윌포드와 커티스, 그리고 길리엄이 나오고 반란이 일어나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아, 이를 어째야 하나, 어차피 똑같아질 거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지, 좋은 방향으로 바꿔야지, 그렇다면 지도자라는 걸 아예 세우지 말자 … 어 그런데 Occupy Wall Street 도 그렇게 해보려다가 결국 권한을 가진 대표자가 없어서 흐지부지 된 거잖아 …  아 어쩌나 …


 


결국 영화는 아예 체제를 폭파시켜버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지나친 상상력에 의한 오독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그걸 결정하는 건 또 여전히 관객의 몫이니까.


 


 


 


5. 요나와 백곰


 


열차가 폭파되고나서 살아 남은 이는 요나와 꼬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놀랍게도 빙하기를 견딘 백곰이 살아 있다.


 


새로운 세상은,


옛 체제를 유지하는데 좋든 싫든 관여한 이들이나 체제의 단물을 빨며 타락에 빠졌던 이들이 만들어 나가면 안된다는 건 당연할 터. 쾌락에 빠져 아무 생각없이 살던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분이 변하게되는 체제의 변동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건 영화 말미에 표현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나마 순수함을 간직하고 나름 혜안의 단초를 가지고 있는 이와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새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상징 정도로 해석해보면 어떨까싶다. 


 


 


 



지구온난화로 거주지인 빙산이 위협받고 있는 북극곰


 


 


 


북극곰의 경우는, 지구온난화가 거론될때마다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이다. 빙산이 녹아내려 살 곳을 잃어가는 백곰의 모습을 비추며 사태의 심각성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상이나 이미지가 아주 많다.


 


그래서 그 백곰은 빙하기가 풀리면서 생물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지구가 다시 북극곰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상징이라고 보여진다.


 


 


 


6. 마무리


 


간만에 뭐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우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영어로 진행이 돼서 그런지 송강호 특유의 맛깔나는 보이스톤과 대사처리가 묻히면서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아서 아쉽다.


 


북미 버전은 20분 가량이 잘려 나간다 한다.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서 날린다는데, 126분이 106분으로 준다니 한국에서 영화 본 우리가 원본을 보게 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셈이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