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브레이커블>, 슬픈 수퍼히어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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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식스 센스>(1999)가 흥행과 비평 모든 면에서 알찬 성공을 거두었던 탓에 M. 나이트 샤말란(본명 Manoj Nelliyattu Shyamalan, 1970년생)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더우기 <식스 센스>에서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과 특히 주연이었던 브루스 윌리스까지 다시 캐스팅해 빚어낸 연작이다 보니 전작의 성공에 너무 기대려 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경우 비평가들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극장가에서도 대부분 ‘기대에 못미친다’는 얘기가 나오기 쉽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를 만든 사람 자신이 앞에 써먹은 이야기틀에서 금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관계를 팀 버튼 감독의 두 작품 <배트맨>(1989)과 <배트맨 리턴스>(1992)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배트맨에 대한 팀 버튼 감독의 탁월한 재해석과 독특한 미술 감각은 <배트맨>을 당대 최고의 영화로 만들었었죠. 뒤이어 만들어진 <배트맨 리턴스>는 팽귄맨이라는 인물을 통해 팀 버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게 되면서 전작에 비해 좀 더 어두침침한 느낌을 주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이 두 번째 작품을 더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하면 저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처음 팀 버튼 식 배트맨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더 좋게 간직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경우가 있죠.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강원도의 힘>(1998) 말입니다. 이 경우에도 저는 <강원도의 힘>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더 좋게 기억합니다. 두 작품이 다 훌륭하지만 첫 작품에서 받은 충격의 강렬함으로 인해 두 번째 작품을 보게 될 때에는 좀 면역이 되어서 아무래도 약간 만만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요. 첫 작품을 보았을 때에만 해도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하며 영화의 높은 완성도 자체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워 했지만 다음 영화를 보게 될 땐 잘 만드는 건 어느새 기본이 되어 버리고 좀 더 새롭고 좀 더 충격적인 뭔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관객의 자연스런 욕심이자 속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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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줄거리에 관한 한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또 어떤 방식이든 영화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미리 갖게 하는 리뷰도 정말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게 될 관객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무척 해로울 뿐이라는 걸 저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언브레커블>의 경우 <식스 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막판 뒤집기라는게 있어서 배급사 입장에선 요즘 그 흔한 관객시사회조차 안가졌던 것이 잘 이해가 됩니다. <식스 센스>만 해도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야!’ 한마디만 듣고 영화를 보게 되면 이 영화를 통해 즐길 수 있는 것의 반 이상은 날아가 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이 영화 만큼은 대부분 보셨으리라 믿고 썼습니다.^^;)

매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언브레이커블>의 내용에 대한 홍보자료는 ‘대학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한 남자(브루스 윌리스)가 열차사고를 당하는데 함께 탑승했던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 와중에 자신만 털끝 하나 안다치고 멀쩡히 살아 났더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물론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심지어 사무엘 L. 잭슨까지도 소근소근 거리는 이 조용한 영화에서 특출한 카메라 워크와 배경음악을 사용해 관객들을 숨 죽이고 따라오게 만드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재능은 정말 대단합니다.

물론 영화에 대한 평가는 영화를 본 관객들 개인이 직접 하게 되는 것이죠. <식스 센스>의 경우 같은 초현실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보기에도 끔찍한 유령들이 출몰하여 관객들을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기 쉬웠던 반면 <언브레이커블>은 보다 지적인 재해석을 요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작과 비슷한 수준의 서스펜스와 반전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극장을 나설 때의 표정이 과히 유쾌하지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언브레이커블>도 참 재미있게 봤구요, 생각할 수록 더 깊은 인상이 남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슬픈 수퍼히어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가사 검열] “I Hope” + “Political Science”

 

일요일 아침,
문득 두 곡의 노래가 생각나서 준비 해 보았”읍”니다.

첫 노래는 Dixie Chicks의 “I Hope”.
우리의 노력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전해주자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노래는 미국 출신 가수 Randy Newman의 “Political Science”.
내용은 가사를 보시면 압니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네요 … ㅎㅎㅎ

I Hope
By Dixie Chicks

Sunday morning, I heard the preacher say
Thou shall not kill
I don’t wanna hear nothing else about killing
And that it’s God’s will

일요일 아침,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네,
살생을 하지 말아라,
살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다,
그게 주 님의 뜻이다,

‘Cause our children are watching us
They put their trust in us
They’re gonna be like us
So let’s learn from our history
And do it differently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있어요,
우리를 믿죠,
우리 처럼 될 거예요,
그러니 역사에서 배워,
새롭게 해 봐요,

I hope, for more love, more joy and laughter
I hope, we’ll have more than we’ll ever need
I hope, we’ll have more happy ever after
I hope, we can all live more fearlessly
And we can lose all the pain and misery
I hope, I hope

난 바래요, 더 많은 사랑을, 더 많은 즐거움과 웃음을,
난 바래요, 우리가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이 갖기를,
난 바래요,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난 바래요,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살기를,

Oh, Rosie, her man he gets too rough
That’s all she can say, is he’s a good man
He don’t mean no harm
He was just brought up that way

로지의 남편은 너무 폭력적이죠,
그래도 그녀는 천성은 착한 사람이라하죠,
해칠 마음은 없는 거라고,
그냥 그렇게 자라서 그런 거라고,

But our children are watching us
They put their trust in us
They’re gonna be like us
It’s okay for us to disagree
We can work it out lovingly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있어요,
우리를 믿고있죠,
그들은 우리처럼 될 거예요,
우리 서로의 뜻이 다를지라도,
사랑으로 함께 화합할 수 있잖아요,

I hope, for more love, more joy and laughter
I hope, we’ll have more than we’ll ever need
I hope, we’ll have more happy ever after
I hope, we can all live more fearlessly
And we can lose all the pain and misery
I hope, I hope

난 바래요, 더 많은 사랑을, 더 많은 기쁨과 웃음을,
난 바래요, 우리가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이 갖기를,
난 바래요,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난 바래요,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살기를,
그리고 우리에게서 고통과 비참함이 다 사라지기를,
난 바래요, 난 바래요,

There must be a way to change what’s going on
No I don’t have all the answers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나 혼자 그걸 해낼 수는 없어요,

I hope, for more love, more joy and laughter
I hope, we’ll have more than we’ll ever need
I hope, we’ll have more happy ever after
I hope, we can all live more fearlessly
And we can lose all the pain and misery
I hope, I hope

난 바래요, 더 많은 사랑을, 더 많은 기쁨과 웃음을,
난 바래요, 우리가 필요한 것 보다 더 많이 갖기를,
난 바래요,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기를,
난 바래요,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살기를,
그리고 우리에게서 고통과 비참함이 다 사라지기를,
난 바래요, 난 바래요,

I hope, I hope, I hope

난 바래요, 난 바래요, 난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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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Science
By Randy Newman



1972년

No one likes us-I don’t know why
We may not be perfect, but heaven knows we try
But all around, even our old friends put us down
Let’s drop the big one and see what happens

누구도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이유를 모르겠어,
우리가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거든,
근데 모두들, 심지어 옛 친구들까지 우리를 실망시켜,
그냥 핵 폭탄 쏴주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까?

We give them money-but are they grateful?
No, they’re spiteful and they’re hateful
They don’t respect us-so let’s surprise them
We’ll drop the big one and pulverize them

우리가 돈을 줬지, 걔네들 고마워하기나 해?
아니, 우리를 경멸하고 증오하지,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그 놈들을 놀래켜주자고,
핵 폭탄을 떨어뜨려서 아작을 내버리자고,

Asia’s crowded and Europe’s too old
Africa is far too hot
And Canada’s too cold
And South America stole our name
Let’s drop the big one
There’ll be no one left to blame us

아시아는 인구가 너무 많고 유럽은 너무 고리타분해,
아프리카는 짱나게 더워,
카나다는 조낸 춥고,
게다가 남미 놈들은 우리 나라의 이름을 훔쳐갔잖아,
핵 폭탄 떨어뜨려주자고,
그러면 우리를 손가락질하는 놈들은 다 사라질 거야,

We’ll save Australia
Don’t wanna hurt no kangaroo
We’ll build an All American amusement park there
They got surfin’, too

호주는 살려둘 거야,
캥가루를 다치게 할 순 없잖아,
거기에다가 완죤 미국식 놀이동산을 만드는 거야,
서핑도 하면서 말야,

Boom goes London and boom Paris
More room for you and more room for me
And every city the whole world round
Will just be another American town
Oh, how peaceful it will be
We’ll set everybody free
You’ll wear a Japanese kimono
And there’ll be Italian shoes for me

뻥, 런던 아작, 뻥, 파리 아작,
너와 나를 위한 공간이 늘어나는 거야,
이 세상 모든 도시가,
다 미국 동네가 되는 거지,
아, 얼마나 평화롭겠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거야,
당신은 일본 기모노를 입어,
난 이탈리아 구두를 신을테니까,

They all hate us anyhow
So let’s drop the big one now
Let’s drop the big one now

어쨌든 걔네는 우릴 증오하잖아,
그러니깐 핵 폭탄 하나 떨궈주자고,
큰 놈으로다가,


2004년


영진공 이규훈

<오 하느님>

 

작가의 명성에 기대어 책을 살 당시, 난 <오 하느님>이 종교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2차 대전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조상 한 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데, 읽다보니 왜 그런 제목이 붙었는지 이해가 갔다. 여러 부대를 전전하는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란 탄식을 해야 했고, 마지막 대목에선 ‘오!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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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 언론들은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민중의 삶이 가장 피폐했던 시기는 일제시대가 아닐까 싶다. 부도가 날 나라가 있는 것과 없는 건, 나름의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인에게 ‘단군 이래 최대 위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냐?’라고 물으니 6.25 때가 아니냔다. 그럴 법도 하다. 우리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것도 모자라 열강들의 대리전으로 우리나라가 붉게 물들었으니.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몽고가 쳐들어와 왕이 강화도로 피신한 사건이 떠오르고, 인조가 나름의 명분을 지킨답시고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머리를 아홉번 찧는 굴욕을 겪은 일도 떠오른다. 수년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임진왜란이 이 리스트에서 빠질 리 없고,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삼국이 땅 따먹기를 한다고 걸핏하면 싸웠던 시절도 결코 평안하진 않아 보인다. 그러니 우리 역사는 민중이 살기 가장 힘든 시기를 따지기가 어려울만큼 어려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그럼 지금은 살기가 괜찮냐 하는 데 생각이 미치고, 결국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지극히 보수적인 걸로 내려진다. 외환위기 때 “이대로!”를 외쳤다던 특권층들이 6.25 때라고 해서 어려웠을 것 같진 않고, <아리랑>을 읽어보니 일제시대 때도 죽어나는 건 하층 계급뿐이었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한 양반들의 삶은 그래도 괜찮았던 듯하니 말이다.

늘 민중의 삶에 천착한 작품을 쓰는 조정래 선생의 작품답게 <오 하느님>의 주인공들도 가난한 소작인이다. 포로로 끌려간 그네들이 오전 작업을 마치고 든 것도 없는 국과 더불어 “흙 묻은 손에 빵을 받”고, “맨땅에 주저앉아 허겁지겁 국부터 마시기 시작했다”는 구절들을 읽노라면, 마음이 짠해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까? <오 하느님>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쿨함을 주창하는 소설들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인지라 조정래 선생의 가치가 더 빛나는 듯하다.


영진공 서민

<추격자>는 좋은 영화인가?





 


<스포일러가 있어요.> 







<추격자>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에는 많이들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전 서울의 강북, 그 중에서도 소위 ‘서민동네’라 할 수 있는 주택가들(아파트촌 말고요)의 그 특유의 미로같은 골목길들의 표정을 제대로 드러내는 영화를 이제서야 처음 본다며 감격했고, 김윤석의 연기에 감탄했으며, 하정우의 연기에 그저 놀라움을 느낄 뿐이었지만, 이 영화가 과연 좋은 영화인가, 그리고 이 감독에게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에는 계속 멈칫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폭력수위에 거부감을 느껴서는 아니에요.  전 사실 피가 튀거나 폭력 그 자체를 다루는 영화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보지도 못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구역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퍽 담담하게 보고 나온 편이에요.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왔으니 영화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셈인데, 영화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살인의 추억>만큼 좋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잠시 멈칫거리다가 “영화 잘 나왔던데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멈칫거림의 정체가, 그리고 “영화 좋던데요”라고는 말을 하지 못한 이유가 과연 무얼까 생각했더랬지요.


솔직히 저는 이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빠진 장르영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보도자료에 맨 처음 써 있던 감독의 말, 그리고 이후 잡지 인터뷰에서 가장 먼저 본 감독의 말은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말이었는데, 전 그걸 보고 더 갸웃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경찰들, 우왕좌왕하면서 범인을 못 잡죠.  하지만 솔직히 김윤석이 수사를 가장 크게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영화에서 과연 시스템의 무능이, 그에 대한 분노가 적절하게 드러났는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결국 저 대답은 감독이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의도라기보다는 ‘만들어진’, 그리고 ‘급조된’ 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영희가 결국 죽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합니다.  저는… 뭐 글쎄요. 마지막에 김윤석과 하정우의 격투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의 살인은 상당히 ‘양식적’으로 표현돼 있죠. 전 그녀가 죽는 게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까지 불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이 장면에 대한 문제제기는, 실은 “대체 이 영화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어진 영화일까”라는 저의 질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두 질문 모두, 실은 이 영화의 윤리성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쾌락을 위해서 이 영화가 살인의 스펙터클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우리가 이렇게 소비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에 대한.


꼭 유영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이제 연쇄살인이 분명 사회적 이슈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에게 특히 공포를 느꼈던 여성관객들의 경우, 사실 이 영화가 (벽화 그리는 내용만 뺀다면)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묘사했고, 그걸 또 하정우가 고스란히 재현해냈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바로 이 면에서 하정우에게 상당히 놀랐던 거거든요.  대다수에게 그저 ‘대상’으로만 비춰질 뿐인 대상을 정말로 ‘대상’으로 그려버리는 예가 이제껏 한국영화에선 그리 흔치 않았고(어떤 식으로든 관객의 ‘이해’를 요구하죠), 그런 걸 연기하는 배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으니까요.  이제껏 영화 속에서 그려진 연쇄살인범들이 이 영화의 하정우처럼 그런 식으로 그려진 예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가 연쇄살인범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들이죠.  이건 프로파일러들의 실제 분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화이트칼라의 인텔리 지능범이라는 설정은, 영화가 실은 연쇄살인이 아닌 도시사회의 계급을 그리는 비유이며, 그 장르의 영화가 성립시켜 놓은 일종의 공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공식과 ‘장르문법의 활용’은, 영화를 일정정도 실제 현실과 거리가 있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예술, 특히 ‘픽션’에선 상당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서 소위 ‘리얼리티’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왜?


창작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겉의 이야기 안에 속의 이야기와 주제를 감추고 있죠.  (이 ‘주제’라는 걸 꼭 ‘교훈’과 등치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나아가 사실 주제라는 거 없어도 좋을 거라 생각해요.  하나의 장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형식을 실험해보고, 그 형식에 대항하기도 하고, 그 형식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 역시 분명 예술의 범위일 테니까요.  그런데 <추격자>의 경우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겉의 번드르르한 이야기 속에 정작 주제라 할 만한 것, 속의 이야기는 없는 텅빈 공갈빵처럼 느껴져요.  그렇다면 이 영화가 형식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가?  다시 이어진 어떤 인터뷰에선 ‘탈장르 영화’ 운운하고 있더군요.  전 그 탈장르 운운하는 얘기 역시 감독 자신도 대답 못 하는 어떤 의문에 또다시 끌어댄 임시방편격 대답이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한 친구와 이런 얘기를 하다가, 분명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사건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화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라고 반론을 하더군요.  하지만… 이건 감독의 대답이 아닙니다. 만약 감독이 이렇게 대답했다면 전 곧바로 수긍해버렸을 거예요.  이건 현실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당하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재현의 의지, 라는 너무나 명확한 작품의 주제와 이유를 포함하고 있는 답변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화라는 건 굳이 촬영 시 앵글과 컷과 편집뿐 아니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에서부터 ‘선택’의 예술이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건 영화뿐만이 아니고요.  우리 현실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거대한 덩어리처럼 서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데, 그 중 어떤 한 부분을 꺼내서 어떤 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는 무수한 선택으로 이뤄져 있고요.  영화뿐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모든 창작은 현실의 재구성이기도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실제 리얼라이프이건 환상이건 꿈이건 이상이건 공포건요.


창작자는 그저 ‘그냥 그 얘기가 하고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 안에는 사실 그저 감독의 순수한 욕망 외에 상당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죠.  감독 자신이 언어로 세련되게 설명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어떤 필요성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에 욕망을 느낀 것이고, 이것은 창작자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속해있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마련이며, 이는 곧 작품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고, 때때로 비평가들은 감독 자신조차 의식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일관성있는 필요성과 이유를 끄집어 내기도 하죠.  (사실 그게 비평가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추격자>는?


만약 감독이 ‘그냥 이 얘기가 하고 싶었다’라던가, ‘굉장히 센, 사실적인 연쇄살인범 얘길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면 차라리 너무 쉽게 수긍해 버렸을지 몰라요.  하지만 감독은 그런 식의 대답은 하고있지는 않지요.  어떻게든 사회적인, 좀 나쁘게 말하면 ‘있어보이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그 대답들은 제게는 하나같이 상당히 공허하고, 아전인수격으로 끌어온 답변들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이 영화에 과연 윤리성이 있는가, 라고 느꼈던 것은, 영화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마구 허물면서, 그 사실과 그가 유래할 파장 같은 것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고 있지 않는 듯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스펙터클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에는 분명 ‘공식화’와 ‘장르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은 폭력을 소비함에 있어 현실세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 폭력을 ‘허구화한’ 즉 ‘허구화된 폭력’을 즐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이것은 다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싶은데요.  영화 속에서 어마어마한 폭력을 구현해놨던 무수한 감독들의 무수한 영화들은 실은 그 폭력을 현실에서의 폭력과 상당히 구분하고 있고, 양식화 시켜놓고 있습니다.  샘 페킨파가 됐던 타란티노가 됐던, 영화 안에서 폭력 묘사가 강해질수록 이 폭력을 둘러싼 ‘영화’라는 경계, 현실에서 분리된 ‘허구’라는 경계가 그만큼 강해지는 거거든요.  하지만 <추격자>는 그렇지가 않죠.  저는 이 영화가 그 부분에 대해 아예 아무런 생각도 배려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겠다, 잘 만들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창작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을 해야 하는 어떤 경계를 아무 생각없이 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