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스프레이>, 춤과 노래에 묻혀버린 사회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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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62년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풍자 정신에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춤 좋고 노래 좋고, 유머 감각도 훌륭해서 보는 동안 낄낄거리며 잘 봤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별로 할 말이 없다는게 고민입니다. 뮤지컬 영화와 나는 왜 이토록 궁합이 잘 맞지를 않는 건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88년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가 2002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나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것을 다시 영화화한 것이 지금의 <헤어스프레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단순히 20년만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시카고>(2002)의 성공 사례와 같이 기존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흥행성이 이미 입증된 좋은 뮤지컬을 보다 많은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복제 생산과 동시 감상 매체’로의 전환 작업의 결과물이란 거죠.

지금은 거의 못가보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연극도 보러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소극장 연극은 지척거리에 있는 배우들의 숨소리와 미세한 표정들까지 놓치지 않고 관람할 수 있는 꽤 특별한 자리죠. 지금 한창 자기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내 앞의 저 배우가 진행 중이던 극 중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와 평범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런 가능의 영역을 옆에 두고 계속 극 중의 상황과 자기 배역 안에 머물기로 약속하면서 형성되는 묘한 긴장 같은 것이 연극 무대의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뮤지컬이나 오페라도 실제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면 그런 현장감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을텐데, 이상하게도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뭔가 맥이 빠지고 시시하다는 생각부터 앞서곤 하니 이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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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물랑 루즈>(2001)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왠만한 멜러 드라마 이상의 감흥을 얻을 수 있었던, 저에게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물론 노래와 춤도 많이 좋아했었죠. 뮤지컬 영화 중에 좋았던 또 다른 예는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2001)이 있습니다. <헤드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먼저 선을 보이고 영화로 다시 찍은 작품이었잖습니까. 하지만 <시카고>나 <드림걸즈>(2006)는 노래 참 잘하네 하는 것 이상의 감흥은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 차이는 결국 뮤지컬이냐 아니냐 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러티브가 충분하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춤과 노래를 강조하느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린 내러티브의 많은 뮤지컬 영화를 통해 ‘뮤지컬 영화는 그저 그렇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거죠. 물론 대사를 하다말고 갑자기 춤 추고 노래하는 뮤지컬 장르 본래의 특성 자체가 드라마에 몰입하기 힘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테고요.

<헤어스프레이>는 뮤지컬 영화인 동시에 코미디물입니다. 인종 차별, 외모 지상주의, 상업화된 대중 매체 등 시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문제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백인들은 록앤롤과 빅밴드 풍의 노래를 부르며 스윙 댄스를 추고 흑인들은 펑키한 리듬 앤 블루스와 소울 풍의 춤과 노래로 재능을 뽐냅니다. 젊은 출연진들 뿐만 아니라 엽기적인 특수 분장을 한 존 트라볼타를 비롯해 미셸 파이퍼, 크리스토퍼 워큰, 퀸 라이파, 제임스 마스덴(아니, 이 친구는 원래 이렇게 노래를 잘 했던 건가요? 깜짝 놀랐습니다) 등 잘 알려진 배우들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고 멋진 노래와 웃음을 선사합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낙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며 시종일관 잘 달리는 것이지만 그런 만큼 쉽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내러티브의 단점은 명백합니다. 악인은 망하고 새로운 희망의 물결은 승리한다는 거죠. 하지만 세상이 어디 뮤지컬 무대처럼 술술 굴러가 주던가요. 기술적으로는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하지만 “그리하여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으로 끝나는 디즈니 명작만화 같은 판타지의 허전한 뒷맛을 저는 <헤어스프레이>에서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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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원작 뮤지컬에서 그대로 가져온 훌륭한 곡들이 참 많은 영화인데요, 특히 여주인공이 ‘사회적 편견을 내재화하고 있는’ 자기 엄마에게 들려주는 Welcome to 60’s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곡입니다. 헤어 스프레이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인 62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냉전 체제가 자리를 잡고 50년대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이라는 극보수주의의 광풍이 한 차례 몰아닥친 시기 이후의 미국 중산층 사회를 지칭합니다.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인권 운동과 자유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시기이면 60년대 후반의 히피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이어지는 사회사적 맥락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이 <헤어스프레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포레스트 검프>(1994)가 어린 시절을 너무 깡시골에서 보내느라 놓쳤던 부분을 <헤어스프레이>는 볼티모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상당히 잘 다뤄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프랜시스 로렌스, <나는 전설이다>

I Am Legend
지상 최후의 사나이는 혼자가 아니다


워낙에 전설이 돼버린 원작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감독의 입장에선 잘해봤자 본전인 프로젝트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작품이든지 소설이 더 낫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며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징에 의거애 어쩔 수 없이 각색이라도 하면 원작을 훼손했다며 난리 난리가 나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기도 하죠. <대부>처럼 원작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프레스티지>도 일각에선 소설이 낫다고 하고, 또 일각에선 그따위 소설을 이만한 영화로 만든 게 그나마 놀란이 붙어서라고도 하더군요.) 아마 이 영화가 기자시사를 개봉 전날, 그것도 오전 10시에 잡은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겁니다. 기자들이야 워낙 스노브들이 많아서 무조건 원작보다 못하다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니까요. (전 결국 못 갔습니다.) 전 솔직히 이제 <콘스탄틴> 하나 만든 프랜시스 로렌스가 대체 뭘 믿고 저 프로젝트를 냉큼 맡았을까, 좀 어이없어 하기도 했고, 예고편이 마침내 공개됐을 땐 “나의 <나는 전설이다>는 이렇지 않아!”라며 울부짖었습니다만,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영화 버전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고두고 다시 보거나 하진 않겠지만, 일단 본 2시간만큼은 즐거웠습니다. 물론 원작소설이 2백만 배쯤은 더 훌륭하고 원작소설을 꼭 읽어보시라 강추를 드리겠지만, 그 원작은 사실 그 어떤 감독이 연출을 해도 제대로 옮기기 힘듭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전설이다]의 설정을 빌어 그냥 다른 영화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소설의 그 엄청난 혁명성과 파괴적 힘은 그것이 문학이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 큽니다. 원작소설 그대로 영화화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솜씨가 좋은 감독이 맡는다면, 중반 이후까지도 엄청난 시각적 쾌감과 이야기적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만, 전 이 소설이 위대한 것은 그 엔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자로 맨 마지막에 ‘나는 전설이다’라고 외치는 게 적혀있는 것과, 영화에서 주인공이 ‘나는 전설이다!’라고 외치는 건 다르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좋은 감독이라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징 때문에 소설의 상당 부분을 각색할 수밖에 없는데, 원작 전체 기둥을 살리겠답시고 부분부분 손을 댔다간 오히려 그 안에서 길을 잃기가 쉬워요. 차라리 원작에서 아주 인상적인 어떤 한 요소를 끄집어내어 그걸 극대화하고, 이걸 위해 다른 부분들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게 더 나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큐브릭이 종종 이런 방식을 취했었죠. 그리고 프랜시스 로렌스가 취한 방식도 바로 이것입니다.


로렌스가 끄집어낸 것은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홀로 남은 생존자의 절대 고독’이라는 요소입니다. 이를 좀더 ‘고독한 현대인’의 정서에 맞추기 위해 원작에선 LA였던 공간배경을 뉴욕으로 옮겨왔고요. 아주 뛰어난 감독이라면 따사로운 햇살과 야자수 아래에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남자의 고독이 더 절절하단 것을 잘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죠. LA의 빌딩숲과 뉴욕의 빌딩숲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빌딩숲이 폐허가 돼버린 장관은 뉴욕이 더 잘 어울리는 게 사실이에요. 기본적으로 차가운 도시니까요. (워싱턴 같은 도시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아마 <다이 하드 2>의 배경이 워싱턴DC였죠?) 그리고 이 절대고독은, 꽤 으스스하게 잘 표현된 편입니다. 윌 스미스가 혼자 황폐화된 뉴욕 거리를 혼잣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게 영화의 반 이상인 만큼 많은 이들이 지루하다고 아우성을 치던데, 애초에 이 영화가 노린 것 자체가 절대 고독인데 그의 모험이 그렇게까지 지루한가요?


기존의 생존영화라면 기본 의식주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진화의 단계에서 어느 순간 버렸던 동물의 지혜를 다시 찾아 옷과 음식을 해결하는 것에 상당한 러닝타임을 소비하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워낙 풍요로운 대량생산 사회고 워낙 기술이 발달한 현대 도시사회입니다. 만약 삽시간에 인간이 다 사라져버렸다 해도, 통조림 음식만으로도 영양실조에는 걸릴지언정 생존에는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저런 현대 문명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진리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셈인데, 원래 진리는 상투적인 법이죠. 게다가 프랜시스 로렌스는 꽤 휴머니즘 신봉자 같아요. 다소 뜬금없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밥 말리를 강조하고 인용하는 건(영화에 쓰인 음악의 반 이상이 밥 말리 음악이죠) 솔직히 낯간지럽긴 하지만, 괜히 쿨한 척하지 않고 너무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말을 하기에 오히려 호감을 갖게 되기도 하고요. 앤과 이선을 만났을 때 ‘갈등’을 공들여 보여주는 것도 좋았어요. <슈렉>을 이용해 아이에게 말을 거는 건 쉬운 방법이었지만 먹히기도 했고요. 그가 그간 얼마나 고독했는가, 그리고 다른 이에게 말을 거는 것에 얼마나 서투르게 됐는가를 보여주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선의 호감을 사는 데에도 성공했지요.


I Am Legend
황폐한 뉴욕 거리에 홀로 살아남아 절대고독에 빠진 인간.


기본적으로 윌 스미스는 워낙 ‘저 곱게 자랐어요’가 얼굴에 써있는 사람이라 이런 캐릭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선지 오히려 처연한 맛이 사는군요. 곱게 살아온 남자가 한순간에 홀로 남은 채 아직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니까요. 물론 로버트 네빌은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자기 생활을 매우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체력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매일 다른 생존자를 위한 AM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주변 경계를 삼엄히 하면서 비상대비책도 세워두었고, 백신을 만들기 위해 매일 체계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하고 이를 꼼꼼히 기록해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게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서 극한의 의지력으로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샘이 죽었을 때 그가 그 통제력을 잃는 건 당연하고요. 좀비들이 쳐들어오는 그 실험실에서, 갑자기 모든 사운드를 죽이고 음악을 깔면서 윌 스미스의 표정을 클로즈업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은 신파를 제공합니다. 아마도 그 좀비들을 보며 로버트 네빌이 느낀 건 절망감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에 대한 절망감. 저토록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절망감. 그럼에도 백신을 보호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밥 말리를 신봉하는 이 휴머니스트의 선택은 외롭고 고독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실 제가 로버트 네빌의 저 바닥없는 고독감을 ‘함께’ 느낀 건, 역설적으로 그 장면이었습니다. 혼자 거리를 활보하며 혼잣말을 하던 때가 아니라요. 다른 사람이 아예 없는 절대 고독의 순간에도 인간은 고독하지만, 아무리 옆에 다른 인간이 있고 그가 나를 염려해주더라도, 결국 중대한 나의 결정은 내 몫이고, 이건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네빌이 그 순간 깨달은 것도, 그런 ‘고독’에 대한 진리일 거예요.


전통적인 좀비영화광들, 특히 로메로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은 근래의 ‘너무 빨라진’ 좀비들을 보며 한탄과 분노를 내뱉곤 하지만, 전 좀비들이 빨라진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나도 모르게 드러내게 되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배타성, 그리고 속도에 대한 집착(컴퓨터 부팅 시간도, 햄버거 가게에서 줄 서는 시간도 못 견디는)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래요. 제가 기억하기로 <28일 후>가 시기적으로는 먼저이긴 했지만, 저는 지금의 이 빠른 좀비들의 영화, 그리하여 현대인의 그 무자비한 공격성과 속도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며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비유로 좀비들을 등장시키는 일군의 영화들의 대표격이자 선두격으로서 오히려 잭 스나이더의 <새벽의 저주>가 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네, <300>의 그 감독이 만든 그 영화.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전 <300>도 아주 좋아합니다. 지금 제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감독 중 하나가 잭 스나이더거든요.) 현재 미국에서 이토록 좀비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건, 단순히 <새벽의 저주>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걸 벤치마킹하는 의미만은 아닐 겁니다. 한편으로는 조지 로메로를 위시한 수많은 좀비영화들을 보고 자란 세대들이 영화판에서 비로소 활동하게 된 시기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시 대통령 치하 하에서, 지금 마치 ‘도대체 누가 이명박을 뽑은 거야? 다들 미쳤고 나 혼자 제정신인가 봐’ 싶은 그 심리를 미국인들이 깊게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따지면 한국에서도 좀비영화가 나올 때가 된 거다, 란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는데, 아마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찍고 있다니 기대해 볼 만하겠지요.
 



영진공 노바리

ps1. 소설에 대한 저의 감상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ps2. 극 중 로버트 네빌의 딸 말리로 나온 윌로우 스미스는 성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윌 스미스의 실제 딸입니다.


ps3. 영화 초반 아주 잠깐 나오는 엠마 톰슨은 정말 그걸로 끝이란 말인가요. 아아 엠마 언니… ㅠ.ㅠ


ps4. <버피와 뱀파이어>의 스핀오프인 <앤젤>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엔젤이 동네 심야극장에서 <오메가 맨>을 상영한다고 좋아라 난리치며 영화보러 가는 장면이 기억나는군요. <지상 최후의 사나이>도 <오메가 맨>도 언젠가 꼭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ps5.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한 권이 더 번역됐습니다. [줄어드는 남자]인데, 이 뒤에 스필버그의 출세작이었던 <듀얼>의 원작이 실려있기도 합니다.

죽다 살아난 김경재氏 第3話




3.
김경재씨는 뒷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어렵사리 눈을 떴다.


새로 왔다는 보건소장과 간호사가 만담 아닌 만담을 주고 받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 순간 갑자기 뭔가 호되게 목 뒤를 내려치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경재씨는 손을 움직여 머리를 만져보려고 했지만, 움직여지질 않았다. 병실 침대 위에 손과 발이 묶여 눕혀져 있던 것이었다.


“젊은이, 병명이 나왔네.”
보건소장의 목소리였다.


보건소장은 누워있는 김경재씨를 내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좌측신체과다발달증이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김경재씨는 대꾸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오, 정신이 드나 보군. 자네의 몸 왼쪽이 다른 쪽에 비해 지나치게 커있다는 말일세.”
“아니요, 저는 오히려 오른쪽 팔과 다리가 긴 편인데 …”
“역시 부정적이야. 왜 내 말을 안 믿는 건가? 나는 검증된 전문가란 말일세.”
“지난 번에 보건소 왔을 때도 그랬단 말입니다. 신체 균형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구부정하게 다니지 말라고.”


그러자 보건소장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그의 뒤쪽에 도열해있는 간호사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러분, 이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거 아시죠!”
“예, 믿습니다.”


그리고 다시 김경재씨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증상을 말해주지. 일단 유독 자네의 왼쪽 다리에만 무좀이 만연해 있네. 그리고 타박상도 왼쪽 신체에 집중돼있어. 게다가 자네의 만성피로는 왼쪽 혈관에 있는 혈전들이 …”
“잠깐만요, 잠깐만요, 무좀이 심한 데는 오른쪽 다리고요, 타박상도 오른쪽에 많잖아요!”
“젊은이, 여기서 보면 거기가 왼쪽이야!”

어이가 없어서 대꾸하기도 싫어진 경재씨를 향해 보건소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의 몸은 원래 오른쪽이 먼저 성장을 하게 돼있단 말이지.”
“그렇게 오른쪽으로 영양분이 계속 가게 되면 남거나 넘치는 게 생길 거고, 그러다 보면 왼쪽으로도 영양분이 흘러간단 말이지. 그게 순리야.”


그때 예의 그 간호사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그게 질서고 숙명이죠.”

간호사가 추임새를 넣어주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보건소장의 말이 더 빨라졌다.
“예, 간호사님. 세상은 자기가 믿는 만큼 보인다고 했죠.”
“세상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신체는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한 쪽으로 영양분이 어차피 집중될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막고 규제해야 다른 쪽이 함께 성장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물리적 조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른쪽이 왼쪽으로 영양분을 나눠주기를 거부하면 어떡할 건데. 그리고 어차피 괴사할 신체조직은 왼쪽에 몰려있는데 그런 조직에 영양분을 낭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혼자서 열 올리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 겸연쩍었는지, 보건소장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잠시 경재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나지막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자네, 번영된 신체. 평화통일된 몸을 이루는데 모든 것을 받치겠읍니까?”
“… …”
“왜 말이 없나. 암부랑 삽관 한 번 더 할까?”


은근한 협박 투의 말이 무척 살벌하여 경재씨는 내키진 않았지만 대꾸를 해주었다.
“아뇨 … 저는 지금 크게 아픈 데 가 없는데 뭘 바치라고요?”


순간, 보건소장이 작은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이 사람, 정말 골수까지 왼쪽이 발달했구만.”
“아니, 제가 뭐가 어떻다고 골수까지 들먹이시는 겁니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좋아, 그럼 이 질문에 대답해 봐.”
“뭔데요?”


“자네 말이야, 밥 먹을 때 어느 쪽 손으로 먹나?”
“오른쪽이요.”
“그렇지, 그럼 글씨 쓸 때는 어느 쪽으로 쓰나?”
“오른쪽이요.”
“거 봐. 사람의 신체는 오른쪽이 대우 받는 게 정상인 게야.”
“예?”


“자, 이제 자네의 신체가 어느 쪽으로 과다 발달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일세.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하게나.”
“…”
“자네 차를 몰고 가다가 왼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그야 깜박이 넣고 좌회전하죠.”
“그래서 자네가 좌측과다발달증이라는 거야.”
“예?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진단이 어디 있어요. 왼쪽으로 가려면 좌회전하지, 소장님도 그러잖아요.”
“아니, 난 P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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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영진공 이규훈

<황금나침반>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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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각계각층으로부터 워낙 다양한 악평이 쏟아져서 매우 기대를 접고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이 영화 꽤 괜찮았습니다.

뭐 생경한 설정에 낯선 용어 튀어나오는 거야 <반지의 제왕> 시절부터 익숙한거고
속편을 예고하는 결말도 <반지의 제왕> 시리즈부터 그랬고
거의 예정된 수순으로 술술 흘러가는 시계태엽같은 이야기 진행도 역시 <반지의 제왕> 때부터 그렇지 않았던가요.

반면에 이 영화에는 나름의 미덕도 있습니다.
일단 데몬이라는 설정 덕분에 동물의 왕국 뺨치게 다양한 동물들이 득시글거려주시고
게다가 CG로 참 귀엽고 생생하게 그 동물들을 살려놓아 동물 구경하는 재미가 꽤 큽니다.
뭐 코카콜라 못 먹어서 흉폭해진 아머베어도 저와 함께 본 누구는 귀엽다는 평을 내려주시기도…

게다가 나머지 시각효과도 꽤나 훌륭해서
스팀펑크물을 보는 것 같은 고풍스러우면서도 SF틱한 분위기의 도시와 건축물들
뭔지 모를 빛나는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마차(?), 비행유람선 등등은 그림처럼 멋있고
니콜 여사도 여전히 비현실적인 외모를 전시해주십니다.

그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제가 아는한,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주인공이 등장하시니
바야흐로 야바위에 능한 어린아이 캐릭터입니다.

얘는 어떻게 된게 아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
뭐 가끔 진실도 있습니다만… 하도 거짓말이 많아서 나중엔 얘의 진심은 뭘까 의심이 되더군요.
더 놀라운 건 어른(동물이건 사람이건)들이 죄다 순진무구 머저리라서 얘 거짓말에 다 속아요.
뭐 어떤 어른의 데몬은 자그마치 ‘곤충’인걸 보면 애가 하는 거짓말에 속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만…

게다가 이 꼬마가 풍기는 분위기는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묘한 것이라
곰 소굴에서 펼치는 “폐하와 제가 하나가 된다” 어쩌고 하는 야바위(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야바위)에는 어딘지 모르게 에로틱한 분위기까지…-_-;;;

여튼 나름 개성있는 판타지입니다.

뭐 제가 워낙 웨이츠 형제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 굿 컴퍼니도 그렇고, 어바웃 어 보이 도 그렇고…)
그걸 떠나서도 아주 나쁘지 않아요.
일단 그 평행우주 세계관이 상당히 정교합니다.

속편으로 가면 아마 현실 평행우주와도 충돌할 것 같던데
문제는 이 영화가 미국에서 죽을 쑤는 바람에 속편 제작이 불투명하다는 거죠.

우리나라 만큼만 흥행되어 주면 걱정 없겠더만요.
애들 데리고 온 부모들로 극장은 한가득이었습니다.
별로 교육적인 영화가 아닌데 말이죠.

뭐 거짓말을 잘해야 성공한다는 교훈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에선 꼭 배워야 하는 것일지도…


영진공 짱가

<대일본인> – 마츠모토의 안드로메다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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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자태부터 여러모로 심상찮다.


2007년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선정되어 주목을 받았으며 그해 부산 국제영화제에도 상영된 바 있는 ‘대일본인’은 마츠모토 히토시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미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마츠모토 히토시는 하마다 마사토시와 함께 ‘다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는 일본 코메디계의 상징적 존재이자 요시모토 군단의 대표스타다. 마츠모토는 프로그램의 구성과 기획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DVD 꽁트를 제작하는 등 크리에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급기야 영화 ‘대일본인’이라는 괴작(?)을 만들어 감독과 주연을 모두 소화해내며 제 2의 기타노 다케시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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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가 다운타운. 왼쪽이 마츠모토, 오른쪽이 하마다다. 하마다는 출연자의
뒷통수를 후려갈기는 걸로 유명한데 하마다에게 뒷통수를 맞으면 뜬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하마다가 때리면 암바로 반격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얌전히 맞자.


꼴극우의 노스텔지아를 노래하는 듯한 영화 제목과는 달리 ‘대일본인’으로 불리는 거대 슈퍼 히어로로 활약하는 다이사토라는 인물을 밀착취재하는 다큐멘터리 형식과 특촬물, 전대물이라는 일본의 문화코드를 접목시킨 기발한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코메디물이다. 전기 충격을 받으면 ‘대일본인’으로 변신하는 다이사토와 웃음을 자아내는 독특한 괴수들과의 대결이라던지, 마츠모토 감독 자신의 본업을 100%살린 위트있는 대사와 상황묘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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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하고 앙증맞은 괴수의 자태를 보라~


게다가 마츠모토는 단지 코메디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일본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니컬한 관점을 담아 놓았다. 인터뷰에서 엔터테이닝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심각한 정치적 의중을 담으려고 한건 아니라고 하였지만 영화에서 느껴지는 냉소와 풍자는 뼈있게 다가온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모습이다. 괴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대일본인’이지만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아니 오히려 비난과 비웃음꺼리로 취급당한다. ‘대일본인’ 다이사토는 늘 자신없고 소심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중년 가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과 사회 전반적인 무기력함, 미국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미국의 들러리로 전락한 일본의 모습을 영화는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관계로 인해 우리가 보기에는 좀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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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인이요? 완전 쉣이예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연히 이따위로 생긴 거대 생물체가 빤쮸만 입고 뛰어다니니
은하계를 지켜준다 한들 어느 누가 좋아할쏘냐..


당 영화는 마츠모토 히토시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준 멋진 작품이다. 그의 등장은 2007년 일본 영화계의 경사이자 일본 특유의 상상력 넘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나와 같은 취향의 팬들에게는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