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합창단’ 단원을 모집합니다!



<멋대로 ‘불만합창단’ 제 2기 단원 모집>


점점 사는게 재미가 없는 분!
되는 일이 없어서 허구헌날 화가 나는 분!
매일 아침 적잖이 속이 쓰려오며 이건 뭔가 아니다 싶은 분!
예전엔 안그랬는데, 요즘들어 자꾸 불만이 쌓이는 바로 그런 분!

빈소년 합창단처럼 꾀꼬리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저 목소리 높여 나의 불만을 외칠 수 있는 건강한 목청만 가지고 계시다면 대 환영!

지난해 전격 결성된 <불만합창단>은 소리없는 인기를 몰아 신촌길거리 공연, 나라걱정가요제 공연, 스트레스없는 직장인을 위한 공연 등등을 거쳐 바로 지금 제 2기 단원을 모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시대의 <멋대로 불만합창단>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습니다.
“지금 세상을 향해 불만을 터뜨릴 바로 당신! 어서오십시오-”

초간단 신청하는 방법
여기로 가서 댓글 달기!!!

기타 문의 사항은 쪽지, 메일(boolman@hanmail.net),
불만합창단 카페 (http://cafe.daum.net/boolman)

많이 애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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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표출하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가? 모른다면 당신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행운아다.
그렇지 않다면 그 즐거움을 알수 있는 기회가 코 앞으로 다가 왔으니!
처음 겪게될 그 즐거움은, 그동안 경험했던 즐거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벅참’을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을 긍정으로 변화시키는 힘, 불만합창이다.

세계 각국의 불만합창단의 공연을 봐도 그러하고, 우리의 공연을 봐도 그러하다.
그리고 당신이 참여할 다음의 공연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늦기전에, 다시 없을 이 즐거움에 모두 참가하시라!

멋대로 불만합창단에서 제 2기 단원을 모집 중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그 즐거움을 느껴봤던 사람 중에 한사람으로서, 불만을 큰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당신의 삶에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어줄지를 보증한다!

 


사진만 봐서 모르겠다구?
그럼 이걸 보셈~~

                        

                                         

모이자, 노래하자, 소통하자. 웃고 떠들고 찡그리고 목소리 높이자. 불만을 노래하면 불만이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걸 믿어보자. 그리하여 부정이 가득한 우리의 현재를 희망찬 노래로 채워보자. 우리의 노래로 현재가 조금씩 바뀌길 희망하며. 우리에겐 그럴만한 힘이 있다. 연대라는 거창한 단어를 끄집어 내지 않고서라도, 모여서 놀며 소통할 만한 힘이 있다.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초간단 신청하는 방법
여기로 가서 댓글 달기!!!

기타 문의 사항은 쪽지, 메일(boolman@hanmail.net),
불만합창단 카페 (http://cafe.daum.net/boolman)

많이 애용해주세요~!

영진공 앨리스

“벤자민 버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한들 세상은 그대로인데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이고 F.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집에 끼어있던 한 단락의 이야기입니다.  원작이 단편인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 한 남자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이 이야기는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한 편의 간단한 구라입니다.  길이가 길지도 않고 디테일한 이야기도 아니죠.  주인공 이름을 보세요.  단추 만드는 집안이라고 성이 [버튼]입니다. (물론 이런식으로 지어진 이름들이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_-;;)

어쨌든 이 짧은 이야기를 가지고 한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설정들과 에피소드, 온갖 놀라운 특수효과가 도우 위에 피자치즈처럼 흩뿌려졌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한 남자라는, 환타지스런 설정에 약발을 더하기 위해서죠.  이런 장치들은 당대 최고수의 테크니션이라고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섬세한 손길을 타고 이야기에 깊숙히 스며들어갑니다.

핀처 감독은 “조디악”때 처럼 불필요한 감성의 자극이나 화려한 테크닉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위해 판을 마련하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시대상황을 훌륭하게 연출해 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을 스크린 위에 소환하기 위해 온갖 특수효과를 동원하지만 이는 영화의 배경과 설정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불필요하게 노출되어 꼴사나운 특수효과 자랑 쇼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핀처 감독은 말도 안되는 구라일수록 시치미 뚝 떼면서 해야 약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검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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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뚝!

영화는 유려한 영상을 타고 한 마리의 고래가 유영하듯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런닝타임이 꽤 긴 편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야기의 완급조절과 배분이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반증이겠지요.   전통적으로 아카데미가 일방적으로 편애해 마지 않는 ‘대서사시 + 러브스토리 + 삶에 대한 긍정적인 교훈’에다가 헐리웃 영화기술의 발달을 저렴해 보이지 않게 자랑하는 특수효과 퍼레이드를 골고루 시연하시니, 과연 아카데미에 최대 노미네이트 “될만 하다.”라는 인상을 짙게 주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당 영화, 칭찬만 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민망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원작의 성격과, 데이빗 핀처의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야심작과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좁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그닥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는 남들과는 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는 80대 노인이면서 어린아이의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20대 소년의 머릿 속에 80대 노인을 품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이런 그의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하고 그저 한 인간의 성장담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벤자민 버튼은 늙은이로 태어났지만 남들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첫사랑을 겪고,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고 … 이건 그가 굳이 벤자민 버튼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제외하곤 주인공의 인생은 지나치게 평범합니다.  평범한 인생에선 평범한 교훈이 나오는 법이지요.

시간은 소중하다고요? 인생에서 젊음은 잠깐 뿐이고 유한하다고요? 그건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점차 늙어가는(갑자기 슬퍼진다…흑)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려고 거꾸로 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살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벤자민 버튼의 캐릭터와 그의 이야기가 충분히 강렬하지 못한 덕에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 버튼의 모습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20대 브래드 피트의 모습을 다시 리와인드 시켜 보는 것은 남자인 저로서도 혹할만큼 매혹적인 장면이었지만, 그것으로 다입니다.  분장쇼 하려고 그를 부른것은 아닐 터인데.

또한 당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작가인 에릭 로스의 터치가 너무나 강하게 느껴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없던 제가 영화를 보는 동안 자꾸 “포레스트 검프”와의 기시감이 느껴졌을 정도로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그가 각색을 했더군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은,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만의 이야기가 강렬하지 못했다는 앞의 이야기와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나 매혹적인 영화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출연배우들도 적절한 연기로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무려 발레리나 역을 소화하면서 전혀 위화감을 주지 않는 케이트 블랑쳇도 그렇고, 틸다 스윈튼도 인상적인 조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배우는 여성적인 역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군요.
 
그리고 주인공인 브래드 피트는 무난하게 전 연령대에 걸친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소리의 톤 조절이나 늙은이처럼 걷는 연기도 능수능란하게 잘 하고 있구요.  다만 늙은이라고 보기엔 너무 각잡힌 그의 체격이 가끔 거슬릴 때는 있습니다.  특수효과를 하지 않고 늙은이 연기를 하기엔 아직 피트는 몸이 너무 좋아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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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피트는 케이트 블랑쳇보다도 머리가 작더군요. 졸리보다도 작고 ... 도대체 이 넘은 외계인인 걸 까요???

영진공 거의없다

“역사교과서를 고쳐야 애국심이 생기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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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로저스는 미국의 상담심리학자로서 인본주의적 심리학이라는 학파를 창설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로저스의 인본주의 심리학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전부 착하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악인들이 있고 온갖 악행들이 펼쳐집니다. 이 사실에 대해 로저스는 어떻게 설명을 했을까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선의를 가지고 있는데 각자가 보는 올바른 세상, 혹은 선한 세상에 대한 정의가 다 달라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즉, 개개인의 의도는 전부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결과가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심각하게 다르기도 하다는 거죠. 그 결과 어떤 이에게는 최선의 올바른 행동인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행동이 되거나 심지어는 악행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로저스의 이런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궤변론자 고르기아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요. 마찬가지로 로저스도 우리들 각자의 세계가 다 다르다는 지적을 한다는 점에서 고르기아스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로저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각자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누구의 세계가 더 건강한 세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죠. 로저스가 내놓은 건강함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일치도입니다.

우리는 비록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는 있지만, 남들이 나와는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보는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의 차이를 인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배우고 그 세상에 맞춰 살거나 최소한 충돌은 하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남들이 보는 세상과 너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부적응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죠. 두 가지 결론 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고요.

우리의 정신건강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실제로 그 사람의 적응수준을 평가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죠. 이 둘이 너무 일치해도 좋을 것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정말 정확히 알고, 그들이 보는 내가 진짜 나라고 믿어버린다면 우리는 대부분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죠(:-p). 하지만 이 둘이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엄청 잘났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한심무인지경인 사람인 경우가 여기에 속하죠. 보통 이런 사람들은 정신병원이나 국회의사당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만… 로져스에 따르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 두 ‘나’가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지만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내가 보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둘의 차이가 너무 크거나 너무 좁아지는 것일까요? 로저스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이 나를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존중해주고, 그렇지 못하면 존중해주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보다는 그 조건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아예 자포자기해버리는 거죠.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 어떤 경우에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주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이런 확신이 깔리게 되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존중해 주는 것을 로져스는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spect)”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로저스에 따르면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 비타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우리들 개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나 문화, 그리고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불거진 역사교과서 수정 논쟁을 보며 저는 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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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소위 “좌편향된” 역사교과서로 공부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 혹은 국가정체성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려고 하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광복’ 보다는 우리나라를 만들어냈다는 ‘건국’에 방점을 두고, 식민지배과정에서도 일제의 수탈과 탄압, 그리고 그에 저항하는 독립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한 근대화의 노력도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보면서 좀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가 소속한 국가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과연 그런식으로 만들어질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역사나 동족상잔의 비극, 민주화 과정에서 벌어진 온갖 부정적인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니까요. 더구나 세계사를 보면 우리나라 정도의 고난이나 실수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과거사는 우리보다 더 긍정적이던가요? 천만에 말씀이죠. 미국의 건국사는 원주민 학살사이고 영국의 번영기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일정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나라 사람들의 국가정체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건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 우리나라는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이니까요.

반면에 자기 나라의 과거사가 부정적이면 자부심이 낮아지고, 과거사가 좀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면 자부심이 높아진다는 그런 생각은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은 앞서 개인의 정신건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저는 우려하게 됩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 나라를 조건에 맞춰서만 긍정적으로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혹시 사실은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창피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열심히 과거사에 분칠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조건에 맞춰서 성형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일제시대를 기술하면서도 그 와중에도 꾸준히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솔직히 하나마나한 이야기(모든 제국은 자기 식민지를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화시킵니다. 그래야 그 식민지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안 그런 식민지가 하나라도 있던가요?)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영진공 짱가

 

“적벽대전2″는 2008년판 영웅본색이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물량공세 액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볼까 말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양조위가 멋있게 나온다는 말에 봤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영화를 보고 여기저기 리뷰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리뷰가 별로 없다. 아마 상영시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고 나와서, 그닥 할말은 없는 영화라 그런가보다. 적벽대전은 새로울 것도 없는, 너무나 멋질 것도 없는, 그러나 꽤 재미있는 오락영화다. 내가 본 바로는 그렇다.

1. 양조위가 조조였다면 어땠을까.

흠냐. 이건 뭐. 양조위 좋아하는 나를 위한 서비스 영화였다. 본래 적벽대전의 주역이 주유였던가? 삼국지야 고등학교1학년때 딱 한번 읽고 본 일 없으니 패스. 처음부터 끝까지 나머지는 다 쪼다고, 주유만 멋지다. 캐릭터만 멋지랴 중간에 팬서비스도 마구 날려주신다. 흰옷을 입고 보여주는 멋진 검무. 짤막하고 나이든 남자가 저토록 멋질 수 있다는 데에 감탄과 감탄을. 허나, 양조위는 나쁜놈일때 빛나는 법. 솔직히 양조위가 저렇게 100% 고순도의 멋지기만 한 남자로 나오는 건 매력이 좀 부족하다. 양조위는 퇴폐 + 탐욕 + 허무 + 고독의 4종 세트가 합쳐졌을 때 진정 빛난다.(그렇다 나 남자취향 변태다.)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양조위가 조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풍의의 조조도 멋졌지만, 아마 양조위가 조조였다면 점점 전투에서 져 갈 때 탐욕의 끝을 경험하면서도 본인의 몰락을 관조하는 듯한 거부할 수 없는 시크(?)한 매력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2. 적벽대전, 2008년판 영웅본색.

오우삼 영화라고 고정관념을 갖고 보아서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계속해서 영웅본색이 보였다. 영웅본색이 남자들의 로망을 집약해 보여주는 남자들의 순정만화라고 볼 때 적벽대전도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1:200의 싸움. 영웅본색에서는 주윤발 한명이 저렇게 해대고, 적벽대전은 다수대 소수라는 점에서 아마도 약분하면 1:200정도 나올 것이다.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이기는 로망이 있는지. 그리고 비둘기는 여전히 날려대더라. 영웅본색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하지만 비둘기가 이렇게 중심소품(?)으로 나오는 영화는 쉽게 볼 수 없다. 오우삼 비둘기 페티쉬인가? 그리고 임신한 아내에 대한 로망도 있나보더라. 소교가 임신했다는데 영웅본색2의 공중전화씬(장국영이 죽어가면서 임신한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강호에서의 의리와 고독에 대한 로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하지만 재미있는 전투씬

떼로 나와서 화살 대빨 쏘아대고, 배 띄우고, 터뜨리는 영화 중에 제일 재미있는 전투신이었다.(물론 이번에도 예외없이 살짝 졸긴 했지만) 일단 원작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차용해온 재미도 무시못할 것이다. 병법, 진법, 화약, 건축 등에 대한 중국인의 오리지날리티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고, 또 그걸 잘 보여주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 “영웅” 등에서 보아온 불량이 아깝고 갑빠가 아까운 전투씬은 아니었다.

이게 끝이다. 오락영화가 오락만 하면 되었지 뭘 바라겠나.

영진공 라이

오바마와 덴트, 너는 내 운명!


<다크 나이트>는 여타 슈퍼히어로물과 비교해 여러 모로 진화한 텍스트다. 볼 때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해 곱씹어보는 재미를 준다. 처음 봤을 때는 미국이 처한 정치적 현실의 은유라고 생각했다. 배트맨의 출현이 더욱 강한 적을 부른다는 설정 때문에 세계 영웅을 자처하다 아랍권의 거센 반발로 오히려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미국의 모습과 겹쳐졌다. 두 번째 감상에서는 배트맨과 미국을 동일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어둠의 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미국 영웅주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알레고리로 읽혔다.  

세 번째는 또 달랐다. DVD로 다시 본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로 해석됐다. (여담인데, 미국 내부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준 감독은 언제나 외부인이었다.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아메리칸 뷰티>(1999)의 감독은 영국 출신인 존 슐레진저와 샘 멘데스였고, <아이스 스톰>(1998)의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배경이 시카고이고 둘째,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가 중요하게 언급되며 셋째, 하비 덴트가 혼란한 고담시를 구원해줄 영웅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크 나이트>가 시카고에서 촬영됐다는 점은 흥미롭다. 전작 <배트맨 비긴즈>는 세트 촬영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제 로케이션 장소가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말 그대로 고담은 허구의 장소였던 셈. 그랬던 고담이 <다크 나이트>에서는 세트를 박차고 나와 시카고 시내에서 영화의 60%를 촬영했다. 놀란의 인터뷰에 따르면, “브루스의 내면에 집중한 <배트맨 비긴즈>와 달리 <다크 나이트>는 한 인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뤄야 했기에 고담 시의 물리적 범위를 더욱 크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시카고였을까? 고담은 뉴욕의 옛 이름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실제 로케이션 장소는 뉴욕이 돼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나는 <다크 나이트>가 결국 버락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뉴욕이 아닌 시카고를 촬영 장소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일 뿐 아니라 정치생명의 꽃을 핀 자궁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등에 업고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영화는 배경을 시카고로 삼을 뿐 아니라 지방검사로 등장하는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차기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심지어 선거가 3년 뒤에 실시됨에도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시장 선거 후보로 후원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이에 덴트 왈, “선거는 3년 뒤인데요.” 그러자 웨인 왈, “내가 후원하면 당선이나 다름없다고.”)

안 그래도 덴트는 무너진 고담시의 법치질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지역 마피아와 손잡은 공권력의 부패가 고담시를 더욱 나락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강조하며 악의 퇴치에 앞장 설 뿐 아니라 잠시지만 조커를 생포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고담시를 구원할 차세대 영웅 하비 덴트 등장이요!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하비 덴트를 후계자 삼아 고담시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듯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적 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목격한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라는 새로운 영웅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극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를 전략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해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임을 은연 중에 환기시킨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해 보건데,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버락 오바마를 모델로 했을지 모른다는 심증을 들게 한다. 그리고 오바마는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며 새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그런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2008 미국 대선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한 셈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런 의문도 든다.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덴트 역의 배우를 백인인 애론 엑하트가 아니라 흑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냐는. 그럴지도. 사실 내가 덴트와 오바마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이미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난 후 <다크 나이트>를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다. <다크 나이트>의 전 세계 동시 개봉일은 2008년 8월 6일.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은 민주당 전당대회는 한 달 뒤인 9월에 있었으니 정말로 놀란 감독이 오바마를 모델로 덴트를 캐릭터화했다면 그것은 모험에 가까웠을 터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의 미국적 상황을 고려하건데 부시의 이념과 반대되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거다. 덴트 역에 애론 엑하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놀란 감독이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할 영웅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건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그러니까 덴트 역의 모델은 현 시점에서 보면 버락 오바마이지만 개봉 당시를 고려하면 미국 차기 대통령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글 초반에 ‘<다크 나이트>는 대통령 당선 전 버락 오바마에게 보내는 영국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충고 혹은 경고’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덴트와 오바마의 연결성은 제쳐두고 질문을 다시 해보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무엇을 충고하고 싶었던 걸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했을 영화에 굳이 하비 덴트를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극단적인 가치 추구는 광기와 같다, 즉 “진실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조커의 말을 빌린 놀란 감독은 흡사 ‘흑과 백’의 구도로 흐르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사이에 ‘투 페이스’ 하비를 끼워 넣고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켜 현실 정치의 회색빛 진실을 알려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조커가 절대 악을 상징하고 배트맨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외형상으로 드러나는 특징들은 정확히 대립을 이룬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과 검은색 슈트, 질서의 파괴와 수호, 익살스러움과 심각함, 부랑아와 부자, 그리고 과장과 은신까지. 극단적인 선은 악과 닮은꼴이듯 조커와 배트맨은 노골적으로 다르지만 그래서 같은 인물이다. (극중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라고 말한 대사를 상기하라!)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캐릭터는 어느 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하비 덴트, 즉 투 페이스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물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정세의 판도가 달라질 것임은 자명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앞면? 뒷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전 세계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인가?
<다크 나이트>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크 나이트>는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며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한다. 맹목적인 믿음이란 광기와 같아서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자신까지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고담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이었다가 희망이 꺾이자 곧바로 조커의 영역에 투신하는 하비, 아니 투 페이스의 행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바꿔 말해,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악을 뿌리 뽑을 필요가 없다. 굳이 뿌리 뽑지 않아도 되니 적절히 용인하는 가운데 그 스스로가 악역을 맡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배트맨처럼. 누구에게? 미국 차기 대통령에게. 그러니까, 버락 오바마에게.

이와 관련, 최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자 세계의 이목은 다름 아닌 오바마에게로 향했다. 동전 앞면을 선택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 뒷면을 선택해 전쟁을 묵인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지. 이스라엘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오바마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약속합니다. 위협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합니다”라고 이스라엘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정치요, 현실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하게 ‘배트맨’이 제목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다.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는 별명과 함께 배트맨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은 바로 ‘망토 입은 십자군’(Caped Crusader)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슬람에 파견한 군대. 세계 평화를 가져오겠다며 대선 전부터 기염을 토한 현실의 하비 덴트는 어둠의 기사가 되어 고담으로 변모한 가자 지구에서 망토 입은 십자군으로서의 맹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바마를 향한 충고는 멋지게 들어맞은 셈이 됐다. <다크 나이트>는 보면 볼수록 무시무시한 영화다.


영진공 나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