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와 일자리 나누기, 정답이 있을까?

“오자룡이 간다” 라는 드라마를 보다보니 특이하게도 재벌가의 사위가 부당해고 당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 나온다. 드라마에서 제법 시대상을 반영하는 구나 싶었지만 역시나 이야기의 전개는 현실 만큼이나 답답하다.

눈길을 끄는 건 그 재벌 사위가 부당해고 당한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받으러 다니는 서명인데, 내용인즉슨 노동자들 자신의 임금을 좀 줄이고 그 임금만큼 해고자들을 복직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와 더불어 요즘 오건호 님이 민주노총의 임금피크제 반대에 대해 비판한 글이 이슈가 되던데 한 번 읽어보면 참 비슷한 이야기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302154105&code=990308

“그런데 현실은 생일 덕담만을 주고받기엔 갑갑하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 자원을 가진 상당수 중심 노동자들은 종종 자신만을 챙기는 ‘이익집단’으로 간주된다. 민주노총은 6개월째 위원장조차 뽑지 못하는 내홍을 겪고 있다. 조직의 생동감을 불어넣는 데 선거만큼 중요한 계기가 없건만, 정파 인사들은 자리를 논하는 ‘짝짓기 테이블’을 급조할 뿐, 노동운동을 부흥시킬 프로그램은 제시하지 못한다. 선거라는 절호의 기회를 매번 뒷걸음질에 소모해 버렸다면, 이들이 지닌 시대적 역할은 분명 종료됐다.

중앙조직의 활동 역시 명분에 치우쳐 일을 놓친다. 요사이 정년 연장에 따른 임금피크제 도입이 논란이다. 민주노총은 임금피크제가 불안정 노동자의 저임금을 악화시킨다며 도입에 반대한다. 하지만 정년 연장의 수혜가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 공공부문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임금피크제 논란이 수년을 거듭해 온 주제임에도 ‘임금삭감 불가’만 되풀이한다. 모양은 정년 연장을 보편적 노동권으로 주창하지만 실상은 중심 노동자를 위한 조치로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미필적 고의’에 가깝다.”

솔직히 임금피크제나 다른 노동자들을 위한 임금삭감이란 것이 형태상으로는 자본가들의 이익은 그대로 보존하되 노동자 자신들끼리 부를 분배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원칙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 피크제야말로 노동자들 사이에서 부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계급간의 문제를 노동자간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년 연장 정책이 들어서게 되는만큼 민주노총의 임금 피크제 반대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주제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세대간의 격차가 벌어진 최근의 상황에서는 임금피크제 반대가 저소득층, 부당해고 당하는 노동자, 사회의 소수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닭과 달걀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형적으로 좁은 한국이다 보니 세력화를 못하면 성취를 할 수 없고, 성취가 없으면 세력화가 매우 힘들다. 그간 대중들의 의식 속에 박혀진 개념으로는 정규직의 희생이 없이는 비정규직이 살아 남지 못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없이 힘있는 노동운동이란 것은 불가능하다. 원론적으론 임금피크제나 잡 셰어링이 올바르지 않을지라도 일단 지금 바로 현실에서 힘들어하는 하위계층을 돕기 위해 이제는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자리 나누기(Work-Sharing) 법안 통과에 반대하며 시위 중인 미국 위스콘신주 노동조합 대표단 (2013)

마음을 얻지 못하면 커다란 하나가 될 수 없을 터인데 노동자들 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간극을 애써 무시하며 지나온 시간이 너무 오래다. 솔직히 이런 상태로 벌써 몇년째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그대로이고 서로에 대한 불신과 대중의 오해는 그대로이다.

그와 더불어 동력이 사라진 노동운동은 대중과 함께하기가 만만치 않다. 오건호 님의 주장대로 이제는 그냥 그대로 있을 수는 없고 뭔가 다른 상상력과 활력이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다.사실 어떤게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를 터이지만 그렇다고 이제까지의 관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혼잣말로 그냥 푸념을 하자면,

사회진보란 참 … 진보세력에게 간디와 같은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또한 수퍼맨 같은 완벽함을 요구하는듯하다.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내는 일은 나에게 무리지만 나름 의미가 있는 해답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려보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영진공 엽기민원

“시티 오브 갓”, 빈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주연: 마테우스 나크터가엘, 세우 호르헤, 알렉산드레 로드리게즈,
        레안드로 피르미노 다 호라, 필리페 하겐센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2005년 개봉작 『시티 오브 갓』.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당 영화는 출중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극찬과 더불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삐까뻔쩍한 전적을 자랑하고 있으며 영화적 재미에 있어서도 높은 내공을 보여준다.

빈부 격차가 심각한 동네 중 한 곳인 브라질은 인신 매매, 살인, 마약 밀매 등 범죄율이 굉장히 높다. 특히 빈민촌을 중심으로 마약 밀매를 통해 형성되어 있는 갱들은 공권력 조차 손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 영화는 이런 브라질의 현실을 60, 70년대 ‘시티 오브 갓’이라는 빈민촌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양아치들의 흥망사를 실화를 바탕으로 그리고 있다.

가이리치스러운 이야기 구성과 역동적인 화면,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유머는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조차 망설임 없이 살인을 자행하는 그들의 일상화된 폭력이 실화라는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오면서 마냥 웃으며 보기에는 거꾸로 입은 빤스 마냥 너무도 마음이 불편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중요치 않다. 브라질의 빈민가는 여전히 지독한 가난에 찌들어 있으며 그 속의 아이들은 폭력과 살인과 마약에 그대로 노출되어 범죄와 함께 성장하고 누군가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하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빈민가 갱들을 소탕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러나 빈민가를 차단하고 공권력을 투입하는 등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지만 오히려 갱단과 경찰의 총격전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엉뚱한 사람을 체포, 사살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 등 시민(정확히 빈민가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가면서 이로 인한 빈민들의 반발은 커져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난은 이미 개인의 문제를 넘어섰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고착화되고 대물림 되는 가난은 한 개인의 힘으로 벗어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빠져나올 수 없는 가난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고 절망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아주 자주 그 선택은 폭력을 수반한다.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을 모두의 비용으로 감싸 안고 같이 가야 하는 건, 단지 그들의 절망을 끊고 희망을 심어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행복으로 가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영진공 self_fish

세상은 부조리


1.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번역이 개판인 문제도 있었지만 정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두달 반 걸려서 두 번 완독했는데도 이건 내가 책을 읽는건지 활자를 훑는 건지 분간이 안갔지. 근데 미팅 나가서는 “순수이성비판은 2판본은 개악이라고 말했던 헤겔 말이 진리예요”라고 개 허세를 떨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창피하지.

도구의 인간이라고 육욕의 도구로 철학을, 그것도 칸트를 들이미는 내 수준은 생각하면 지금도 낮짝이 화끈거린다.

근데 이게 또 은근히 먹혔어요. 형이상학을 무기로 허리하학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나도 가관이었지만 그거에 또 홀딱 넘어가는 세상도 부조리하긴 마찬가지였던 거라. 돈으로 치자면 한 2천원짜리 수준의 논쟁이었지.

대신, 돌베게에서 나온 책들은 눈에 쏙쏙 들어와. 간결해. 명쾌해. 자본론은 의외로 머리에 콕콕 박히더라 이거지. 때는 92년. 87년 봄의 끝물같은 세상에 아직도 먹히는 아이템이었기에 나는 맑스도 읽고 레닌도 읽고 막 그랬을거야. 아니 그랬어. 도구의 인간.

내 정치적 지향점이 된 순간은 창피하지만 육욕의 도구로 시작된 철학적 욕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력의 종이 되어버린 칸트의 철학은 자본론 앞에 무참히 깨어져 버린 셈이지”라고 맺고 낮게 투쟁가 한소절 부르면 ‘동지적 결합’이라는 탈을 쓴 욕망의 달콤한 선물이 툭, 떨어졌다.

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2.
부조리.

안전벨트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선 더 잔인한 장면을 찾아야 하고, 불쌍하게 죽은 경찰을 위해선 그 가족의 비통한 오열을 잔인하게 담아야 하고, 한 노동자의 분신을 이야기 하기 위해선 굳이 필요없는 고용자 가족의 개인사도 헤집어야 한다. 희망을 주기 위해선 처한 환경보다 더 못한 누군가의 비루함을 꺼내야 하고, 꿈을 주기 위해서는 성공한 사람이 다시 되돌아 보기 싫은 지옥같은 경험을 토하도록 해야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끔찍하게 죽어가는 암환자와 그 가족의 비통한 눈물에 뷰파인더를 집어 넣어야 한다.

3.
이번 정권을 보고 있자니, 스무 살 때 내 치기를 보는 것 같아. 다를게 하나 없는거야. 친서민을 외치면서 뉴욕에 쳐바를 돈 50억 빼느라 없는 자의 몫을 빼는 거. 그거 진짜 육욕에 미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거거든.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말들, 칸트 번역했던 그 개똥같은 책 만큼이나 뭔 말인지를 모르겠어. 와나. 이거 뭐 국격의 수준이 내 스무 살 욕망의 수준이랑 차이가 없으니 누구한테 이야기하기도 쪽팔린거야. 누구 말대로 복지는 혜택이 아니고 권리야. 이거 고등학생 정도 수준의 애들 교과서만 봐도 나오는 이야기 아니야?

그나마 사회 나가서 사람과 부대끼고, 힘든 사람들 눈물을 보고, 그들 눈물과 별 차이없는 내 통장의 잔고를 보고, 58원이 빈다고 새벽 2시에 가계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 아내를 보고, 커가는 자식 놈 키우면서 아둥바둥 사니까 난, 반성이라도 했다.

바르게 살자고. 바르게. 남 피해는 안주게.

어렵지. 그래 어려워.

그래도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사람들이 이정도 어려움은 좀 뼈져리게 느끼고 살면 안되는 거야? 나 같은 놈도 반성하는데 말이야. 씨**들아.

4.
부조리.
혁명을 위해서는 부패가 있어야 하고, 민중이 일어서려면 죽음이 있어야 하고, 세상을 바꾸려면 꼭 피를 봐야하는 거. 슬프다. 겁나는 건 그거다.

누군가 안한다면 그게 내가 해야 할 몫일 수도 있는 거.

그래서 우린 전태일에게 박종철에게, 이한열에게, 그리고 지금의 김진숙에게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거다.

제기랄.

누가 좀 멈춰줘요. 아니 내가 멈춰야 하는 데 그거 한 발이 무섭고 떨리고 겁난다. 내 한 발 떼서 나가야 하는 용기가, 내 마누라, 자식, 엄마, 여동생, 친구, 2층집 할머니, 아들놈 유치원 동창이랑 그 녀석 아빠가 막 생각나.

제발, 이번 정권에서 우리가 상처입고 반성만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한다. 그게 부처님이건, 알라건, 예수건 암튼 제정신 박힌 신이라면 듣겠지 하고 말이다.

부조리. 세상은.

영진공 그럴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