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살벌한 연인”, 무난하고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


사람이란 게 모든 사안에다 대고 극단적인 정반대의 해석을 동시에 놓을 수 있기 마련이지만, 연애는 특히 더 하다. 우리는 연애란 게 사회적인 관계임을 잘 알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라 생각한다. 사실 연애를 하면 폐쇄적이 되기 마련인지라, 자칫하단 연애 몇 달 혹은 몇 년에 연락하는 인간관계 다 끊기는 사태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리고는 외롭다고 청승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폐쇄성이, 하나의 사실을 두고 끌어낼 수 있는 해석들의 반대극차를 더욱 극단적으로 크게 만든다.

『달콤, 살벌한 영화』는, 비록 전지적 시점에서 대우(“박용우”)가 모르는 미나(“최강희”)의 생활과 비밀들이 비교적 초반에 관객에게 노출되어 버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철저히 대우의 시점이다. 연애와 관계의 재구성은 사실 각자 주관적인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녀에겐 그녀의 피치못할 사정이 있지만 – 그게 아무리 연달은 살인이라 해도 – 그가 그것을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그에게 결국 그녀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세계에 살고 있는 이해 못할 사람이다.

이성과 합리의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대우의 세계는 그녀의 미신과 무식, 비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살인’이란 그 모든 걸 상징해주는 것일 뿐. 미나가 떠나기 전, 그녀의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고 엘리베이터에 탄 대우가 “한두 명이라면 어떻게 이해해 보겠는데~~~” 하며 머리를 박는 건, 그 무시무시한 코믹성에도 불구하고, 그렇듯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상대를 향한 서글픈 아쉬움을 칼날처럼 표현한 대사이리라. 그가 헤어진 연인의 흔적을 뉴스에서 찾는 것도, 그의 머릿속에 그녀는 그녀의 사정과 이유와 사연은 이해되지 않는 채 그저 살인자로서 정립되어 있는 탓이다.

하긴, 모든 연애가 그렇지. 안전한 길을 선택해 서로 비슷하고 공감대도 같고 심지어 서로 비슷한 생활권에 존재하던 사람과 연애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우주와 나의 우주는 일견의 비슷한 모습 뒤로 확연히 다른, 별개의 우주임을 매 순간 확인하게 된다. 가 닿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때로 우릴 절망시키지만, 사실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누구도 자신의 세계가 다른 이와 완전히 통합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설사 나의 의식은 그걸 원하더라도, 나의 무의식은 그걸 완강히 밀어내고, 만약 내가 일방적으로 흡수당한다 느껴지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손톱을 세우고 저항하기 마련이다.

딱히 맘에 드는 포스터는 아니다.
이것은 뭐, 사실 당연한 자기방어 본능이기도 하고. 아무리 두 사람이 -10cm의 거리(음… 너무 작은가… 그래도 평균이…)를 만들고 그걸 유지한다 해도. (그 가닿을 수 없는 거리 때문에 사다는 칼질도 하기도 하지.) 게다가, 그것이 첫 연애라면, 필연적인 “미숙함” 때문에 더할 것이다.

연애에 대해 꽤나 살뜰하고 섬세한 우화. ‘우화’라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나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지만, 사실 미나와 대우의 관계는 수많은 연애 관계에서 반복되는 타입(인간은 다 다르면서도 똑같은 거니까.)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많이 웃으면서도 순간의 상황과 대사의 빛나는 통찰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나의 경험도 비추어 보게 되고. 연애는, 해도해도 미숙하다. 사람을 사귀고 사랑하는 것 역시 그렇다. 상대의 나이가 성별이 어떻든, 그 관계가 연인이든 친구이든 무조건 신뢰하게 되어 의지하는 좋은 사람이든.

영화는, 마치 ‘드라마’처럼 참 무난하게 찍혀서 별 특징없이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하지만 감독이 만약 소위 되도않을 ‘예술적 야망’에 대한 욕심을 부렸다면, 이 우화는 완전히 실패해버렸을지도. 나름 안전한 선택인 셈이다. 배우들은 아주 좋고, “박용우”는, 당시 아마도 로맨틱 코미디는 처음인 듯한데 아주 잘 어울린다. 어느 정도의 나이와 관록이 보이면서도 여전히 순진함을 유지하고 있는 마스크와 연기. 최강희도, 이전에 보이지 않던 잔주름이 보이긴 하지만, 정말 괜찮은 로맨틱 코미디 배우다. 조연들도 좋았다.

로맨틱 코미디에 어울리는 배우란 게 배우한텐 욕 아니냐고? 천만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힘든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남녀간의 밀고당기기야말로 정치9단의 스릴러의 최고봉이고,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어필할 수 있고, 관객의 감정이입도와 이해도도 가장 높은 게 로맨틱 코미디이며, 그러면서도 한 시대의 세태를 의미있게 묘사해낸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과장 좀 보태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 못지 않는 걸작이다.)

여전히 대한민국에선 그런 의미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거의 나오질 않는다. 모두들 로맨스와 코미디를 섞으면 로맨틱 코미디라고 오해해왔으며 가능성을 보여준 감독들은 조금 하다 좌초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도 역시 내가 본 건 ‘가능성 영역’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여타의 그것들보다 훨씬 낫고, 산뜻했다.

영진공 노바리

『반지의 제왕』을 통해 살펴보는 박정희 신화의 의미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한때 [안좋은 추억] 시리즈가 유행한 적이 있다. 개그맨 정준하는 왜 떡국을 기억 못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떡국에 관한 안좋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왜 개구리를 싫어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개구리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들도 모두 좋건 안 좋건 자기만의 추억을 한 두개씩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킨드(D. Elkind)는 이런 자기만의 추억을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라고 불렀다. 내가 어떻게 연애에 성공하거나 실패했는지, 내가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거나 낙방했는지, 내가 어떻게 직업을 찾고 어떻게 그 직업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같은 것들이 모두 이 개인적 우화다. 술자리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나 가끔 흘릴 뿐, 남들에겐 잘 하지 않는 나만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데 이 개인적 우화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로또 당첨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주에 범상치 않은 꿈을 꿨거나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누구는 불나는 꿈을 꿨다고 하고, 누구는 똑같은 번호의 버스가 연달아 오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이나 경험이 로또 당첨을 설명해 주는 개인적 우화가 된다. 그런데 사실은 이상한 꿈 때문에 로또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되니까 지난밤 꿈이 이상해 보이는 게 더 맞다. 생각해 보라. 꿈치고 이상하지 않은 꿈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진짜 이상한 꿈을 꿨다 싶어서 복권 샀는데 꽝인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최소한 일주일에 수백 만 명이 그렇게 이상한 꿈을 꿨다는 이유로 복권을 살 것이다. 모든 꿈은 다들 어딘가 이상하지만 우리는 그런 꿈을 꾸면서도 별일 없으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나중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면 지난번 꿈도 덩달아 특별해진다.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실제 사건의 세부사항 중에 어떤 것은 생략되고 어떤 것은 덧붙여지면서 결국 실제 사건의 본질은 왜곡되어 버린다. 사건이 개인적 우화로 바뀌는 과정이다. 그런데 어떤 개인적 우화는 한 개인만이 간직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그러다보면 개인적 우화가 아니라 전설과 신화가 된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우리나라에서 보다 영국미국 문화권에서 훨씬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 영화다. 우리에게 이 영화는 그저 영화 『트로이』급의 웅장한 대작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영미 문화권 사람들에게 이건 원초적인 세계관을 집대성한 기념비다.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세계는 서양 판타지 문학에서는 언제나 등장하는 공간이다. 이 서양 판타지 문학이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된 것이다.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 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다.

J.R.R. Tolkien

이 모든 것은 이 이야기의 창조자 J.R.R. 톨킨에서 시작되었다. 아시다시피, 톨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19세기 말(1892년)에서 20세기 중반(1973년)까지 영국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으로『반지의 제왕』을 써냈다. 하지만 그가 신화들을 조합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세계는 단순히 판타지만은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살아생전에 겪어야 했던 1, 2차 세계대전이었다.

대량학살 전쟁의 시작이 된 1차 세계대전

톨킨은 이 역사적 대사건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 시작은 우리 모두가 만들어내는 개인적 우화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에겐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그의 개인적 우화는 책이 되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고, 그 전설은 공유에 공유를 거쳐가며 영미 문화권이 역사를 설명하는 신화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신화가 만약 1,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그건 사실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만약 2차 세계대전이 반지의 제왕이야기라면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할 거다. 거기다가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하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가 그렇던가?

권력욕에 사로잡힌 악의 무리들과 그 부하인 흉칙한 괴물들

선함을 상징하는 백색의 마법사

빛과 어둠의 싸움...2차 대전이 이런 전쟁이었나?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 쪽 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다.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으니까.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뭔가 그럴듯한 다른 이유가 붙었다. 그것은 선과 악의 전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2차 대전 덕분에 일본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끔찍한 사건일 뿐이었다.

반지의 제왕에서도 왕을 세우기 위해 우리 같은 민초들은 셀 수 없이 죽어나간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 신화도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가면 갈수록 더 대단한 대통령이 되어간다. 사람들은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은 불가능했었고, 그가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오래 전에 공산당 국가가 되었을 거고, 심지어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핵보유국이 되었을 거라고들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던가. 박정희 때 중화학 공업에 투자하고 고속도로를 깔기 시작한 거는 맞지만, 그 계획은 박정희가 쫓아낸 장면 정부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박정희 때는 늘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열심히 차관을 빌려야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치금융과 관치경영의 기초를 닦았고, 지역감정을 뿌려놓았으며, 군사문화를 뿌리박아 놓아서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시발점을 제공했다.

박정희 ...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결코 박정희 신화를 무너트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신화가 된 이유는 경제의 기적을 일으켜서도, 조국 근대화를 이루어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의 일생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현재를 가장 극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별 하나짜리 장교가 나라를 집어삼키고, 수십년간 권력을 유지했으며, 그 집권기간 동안 우리나라 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음으로써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점이 바로 그를 전설로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성세대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그 어떤 사소한 경험도 그걸 박정희와 연결짓는 순간 더 이상 사소한 개인사가 아니라 거대한 전설의 한 줄기로 의미가 격상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 그 자체는 일어나자마자 흩어져서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즉 우리 마음대로 그 사건을 해석하고 덧붙인 개인적 우화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단위에서 정리된 과거들만으로는 사회가 구성되고 작동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공동체는 구성원들의 과거 기억을 통합함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건 결국 개개인의 우화가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에 전승되는 전설의 형태로 통합되고, 그 전설은 다시 그 집단들이 뭉친 국가의 신화가 되는 과정이다. 이게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는 말의 뜻이다. 이 이야기, 이 신화가 무엇이냐가 우리의 현재 경험을 결정짓는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국가적 단위의 신화보다는 부족단위의 전설들만 있는 거 같다. 최소한 두 개 부족의 전설이 이 나라를 지배한다. 한 쪽 전설을 가진 사람들은 현재 우리나라가 그들의 가치관에 따라 개조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또 다른 전설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대로 가다간 이 나라가 치유불능의 망국으로 치닫으리라 여긴다. 나 역시 이 두 부족민중 한명인데, 한 쪽 부족민의 입장에서, 나는 도무지 상대부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세대갈등이니 좌빨이니 하는 얘기가 오간다.  결국 문제는 전설의 통합이다.

박정희 전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내는 일. 그게 이 골 때리는 현시국의 미친 짓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일 거다.

서비스컷: 아르웬 ...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