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무대 위의 삶 그리고 이중 자아


<블랙 스완>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는 사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년 말 미국 개봉 직후부터 영화가 아주 대단하다는 소문이 들려왔었고 마침내 때가 차매, 나탈리 포트만은 골든블로브에 이어 아카데미에서까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국내 개봉 이후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압도적”이라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는 작품이니까.

영화를 보는 이들마다 관점과 그에 따른 반응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로부터 압도 당한다는 경험은 일상 생활에서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휴식 같은 영화 관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경험이 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관객을 2시간 동안 압도할 수 있는 영화란 의외로 많지가 않고 그런 만큼 상당한 가치를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개인적으로 <블랙 스완>은 관람하는 동안 정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까지 매우 힘들게 느껴졌던 작품이다. 상영 시간 내내 온 몸을 긴장시키며 보느라 다른 영화를 볼 때와는 다르게 고생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2시간 내내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말하는 건 좀 과장인 것 같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150km 안팎의 속도로 계속 운전하고 난 뒤의 피로감 같은 것이 급격하게 몰려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날카로워진 감각이 다시 가라앉기까지 두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전작 <더 레슬러>(2008)의 다소 느슨했던 분위기와는 달리 관객들을 시종일관 초긴장하게 만드는 영화가 바로 <블랙 스완>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줄거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뉴욕 발레단의 젊은 무용수 니나(나탈리 포트먼)가 <백조의 호수>의 주연으로 발탁되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초연을 마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겉에서 보기와는 달리 발레단 내부의 치열한 경쟁과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기 위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그 중심에 선 인물의 내면 세계는 매우 복잡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니나의 경우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으로 새로운 솔리스트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만 흑조(블랙 스완)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한계를 경험하면서 노이로제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블랙 스완>은 결국 니나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압박감과 신경증적 세계에 관한 작품이다.

<블랙 스완>은 언듯 90년대 초반에 한창 유행했던 사이코 스릴러의 내러티브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는 음모도 반전도 없이 오직 니나의 내면 세계와 그것이 바깥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만이 존재한다. 영화 속에 주인공과 직접적으로 갈등하는 타자 – 니나의 어머니(바바라 허쉬)나 릴리(밀라 쿠니스) 등이 유력한 후보이긴 하지만 – 가 부재한다는 사실은 대중 영화로서 뭔가 허전한 감을 남기게 되는 이유가 되는 반면,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리는 구조적인 이유가 된다.

<블랙 스완>은 얼토당토 않는 스릴러적인 재미의 구축에 힘을 쓰기 보다 니나를 중심으로 한 발레리나의 세계와 <백조의 호수>라는 텍스트가 갖고 있는 메타포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재능과 함께 나탈리 포트먼의 헌신적인 연기라고 단언할 수 있다.

<블랙 스완>이 남다른 완성도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부분 중에 하나 – 그러나 가장 중요한 – 는 전문 무용수에 버금가는 주연 배우들의 동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탈리 포트먼의 경우 투자가 결정되기도 전인 촬영 1년 전부터 자비로 훈련을 시작했다고 하니 이런 열정이 마침내 좋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영화 초반에 니나가 <백조의 호수>의 솔리스트로 뽑히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엄마에게 전화로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나탈리 포트먼의 표정 연기는 이미 주연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펙타클하다. 물론 영화 전체의 하이라이트는 마침내 무대 위에서 완전한 블랙 스완으로 변모하여 관중들의 찬사를 받게 되는 니나의 모습이겠지만.



대략 10년 정도 숙성된 시나리오였다고 하는데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애초에 <더 레슬러>를 만들 당시 퇴물 레슬러와 발레리나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꾸밀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담기에는 너무 많다는 판단하에 지금의 <더 레슬러>와 <블랙 스완>,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하니 두 작품 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듯 하다.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무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인물들의 이중 자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다. 그리고 두 주인공 모두 각자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성공적으로 완성해내는 결말도 유사하다.


영진공 신어지


 


 

“7년의 밤”. 독자라서 행복한, 스티븐킹보다 서늘한, 그러나 뜨거운 소설


독자라서 행복한,
독자라서 행복한 소설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라면 상상도 못할 주제, 나라면 상상도 못할 스케일, 나라면 상상도 못할 디테일,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전개. 그런 것들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선사하는 소설 말이다. 독자에게 최악인 소설이라면 그 반대의 것일 것이다. ‘이런 소설 나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실제로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와는 관련 없이 그 만큼 도무지 신선한 것도 압도적인 것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티븐 킹 보다 서늘한,
내 독서량이 일천하기 때문에 아무 소설이이나 함부로 연상하고 색깔을 입히는 것은 안될일이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잡고부터 이런 저런 소설들에서 스타일이 겹치는 부분이 없는 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7년의 밤’을 손에 잡고 정신 없이 읽어 나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면 얼른 떠오르는 한국 소설은 없다. 내가 장르 문학을 많이 읽지 않아서인 탓도 있겠지만, 추리, 공포, 범죄 소설의 느낌을 그려내는 본격 문학 주류 작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일천한 독서력(讀書歷)에 떠올린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티븐 킹이다. 배경에 대한 세밀한 포석, 분/초 단위의 촘촘한 사건관계 구성, 불우한 주인공(?) 등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떠올리게 했으며, 인간 내면에 존재한 불안감과 공포. 그 불안감과 공포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그 자신이 괴물이 될수도, 혹은 괴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음을 그려낸 세세한 내면묘사와, ‘인간 집단’자체가 얼마나 비이성적인 괴물이며 무자비한 폭력을 행하는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뜨거운 소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와 스키븐 킹의 소설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의 밤’이 뜨겁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간혹 ‘따뜻한 것’은 있으되- 내 영혼의 아틸란티스, 사다리의 마지막 칸 등- ‘뜨거운 것’은 없었던 듯 하다. 스티븐 킹 소설에서 따스함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련한 회한이랄까.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7년의 밤에는 ‘현재 진행 중인 것’에 대해 잃지 않으려는 뜨거움이 있다. 무자비한 폭력의 사이에서도 냉소와 허무와 자기 부정으로 상황을 등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 붙고 물고 늘어지는 그 뜨거움. 그 어떤 기법적인 장점보다, 그 뜨거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진공 라이

“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2)



 바보들의 행진
영화음악 『바보들의 행진』에 실린 송창식의 곡은 이후 그의 행보를 모두 점쳐볼 수 있게한다. 특히 그가 작곡한 두 곡,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이미 트로트와 포크의 만남에 싸이키델릭-록의 반주까지 고려한 모습이다. 싸이키델릭으로 만든 고래 소리가 들어있어 콜렉터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영화음악 버전 “고래사냥”이 실려있는데, 막상 들어보니 그 고래 소리가 나에겐 별반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행진곡 풍의 곡에서 하몬드 올갠과 슬라이드 기타가 역동적인 자리(중심은 물론 아니지만)로 위치지웠다는 것은 신선하고 중요한 지점으로 들린다.

“고래사냥”은 기본적으로 마칭 드럼(꽹과리 소리를 흉내냈다고 해도 좋다)-행진곡 풍의 작곡에 촛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슬라이드 기타로 흥을 돋군다. 흥 돋구기는 트로트를 대놓고 차용한 “왜 불러”의 가창법에서 더 절정이다.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의 하나가 되는 트로트이면서도 송창식의 것으로 귀결되는 이 ‘흥'(을 돋구는 창법)과 기발함이 이미 이때부터 충분히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송창식의 이러한 시도들이 1970년대 초반에 들어 앞서 나간다는 가수들이라면 한번씩 머리 속에 그려보거나 (거칠게)시도했다는 데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 있는 신화 – 신중현은 논외로 치더라도 키브라더스(윤항기)는 산타나의 음악을 리메이크하면서, 한대수(두 번째 음반)는 자작곡에 농악과 타령을 집어넣었다. 포크와 록의 만남은 1974,5년 봇물터지듯 여기 저기서 시도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르면 젊은 음악인들 사이에 장르를 넘어선 다양한 실험이 여기저기서 마구 시도될 만큼 무르익었었다는 얘기다.

또한 『바보들의 행진』음반에는 임희숙, He5, 김세환, 이장희, 투 코리언스의 노래가 더해진다. 조합만 봐도1970년대 초반 새로운 음악으로 등장한 쏘울, 록, 포크가 하나로 모인 느낌이지 않은가? 특히 주목할 이는 포크 계열이라고 하나, 특유의 반항적 이미지와 록을 대담하게 수용했던 이장희(그리고 그의 곡 “한잔의 추억(음반에는 ‘한장’으로 오기되어 있다)”을 부른 더욱 위악스런 목소리로 부른 김도향과 손창철 – 투 코리언스)의 가세이다.

포크 음악인에서 막 새로운 음악으로 전진하는 송창식과 그 보다 앞서 록을 받아들였던 이장희가 한 음반에서 만나는 장면은 1970년대 중반 청년 문화/대중음악이 하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음반 전체를 넘실대는 음악은 (이미 단속과 규제의 대상이 된 저항적 포크는 많이 탈색되었지만) 록, 소울, 포크가 휘감겨 들어와 판을 차리고 아예 그 이전 대중음악 판 자체를 뒤집어 버릴 듯 기세를 올리고 있다. 미국 음악의 여러 요소가 파편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젊은 세대를 자극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기존의 주류였던 트로트마저 품어서 새롭게 주물럭 거릴 수 있을 만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고 또 다른 색깔마저 찾은 것이다.

3. 그래서 더 답답한
『별들의 고향』에 이어, 『바보들의 행진』은 단순히 잘 나가던 음악인들의 편집 음반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도들이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이고 마무리 단계로 나가고 있음을 슬금슬금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정권은 더욱 미친듯이 이들을 찍어누르고 마침내 질식사 시키긴 하지만.

사실 이 음반은 폭발하지 않는다. 영화 만큼이나 넘치는 음악을 자신 안에서 고사시킨다. 이 기운은 그렇게 그 해(1975년)를 다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청년문화로 칭송되던 음악은 대마 연기와 함께 그렇게 금지곡으로, 활동 금지로, 미국행(추방에 가까운 이민)으로 사라진다. 새로운 기운에 찔끔해서 부랴부랴 눌러 죽이기 바빴던 박정희와 그 밑의 똘마니 새끼들은 자기 색을 찾기 시작한 젊은 음악밭을 락스로 싹 행구고 그래도 남은 애들은 뿌리까지 파 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박정희가 좋아했던 그 5음계(요나누끼 음계)로 작곡된 “새마을 운동가”와 트로트로 채워놨다. 젊은 음악이 피어오리기 전, 딱 10년 전 음악으로 타임머신을 돌려버린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TV 속에는 트로트 가수만 나왔다. 그 때 난 그게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즈음엔 그와 전혀 다른 그리고 완성되어가던 다른 음악이 있었음을 전혀 알수 없었다. 그저 외삼촌이 들려주는 음악들이 신기하고 좋아 보였을 뿐.

『바보들의 행진』 O.S.T.나 1970년대 초반의 한국 가요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입인)힙합을 제외한 한국 대중음악은 이 때 이미 다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록 밴드 중에는 라틴 록이나 레게를 지향하는 밴드들이 있었고, 포크 진영에도 고급스런 발라드를 지향하던 이들이 있었다. 아마 이들이 모두 박정희 덕분에 압사 당했기에 1980년대 조용필 신화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필 자신도 대마초의 피해자였지만 꾸준히 살아남았던 반면, 대부분은 정권의 짓밟힘에 트로트로 근근히 유지하거나 아예 음악을 꺽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이들이 모두 계속 음악을 했다면 ……? 조용필급 뮤지션, 혹은 그 이상으로 대중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음악인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재즈나 록이 한국 대중음악의 영원한 음지식물로 남지 않았을런지도.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지랄맞고 짜증난다. 차라리 이런 음반들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답답함이 생기지나 않았을텐데.

4. 지금은 뭐 다르나
임희숙이 부른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쏘울과 스탠다드 팝이 섞인 듯한 저 멋진 노래를 거미에게 부르라고 하면 밑도 끝도 없는 한국식 알앤비 아닌가하는. 물론 30년 전 연주이니 악기 소리는 꽤 낡았지만, 그것도 사운드만 지금 가요 세션 악기 소리로 바꿔주면(연주 패턴은 그대로 놔둬도) 그냥 알앤비(R`n B 얘기하는게 아니다 그냥 알앤비!!!)다.

그 뿐인가. 김세환이나 He5의 곡도 사운드와 목소리만 바꾸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빛이 될 듯 떠들던 인디 씬의 록/포크 성향의 누구 누구가 떠오른다.

오히려 송창식이나 이장희의 통속적이고 실험적인 곡들은 지금도 신기할 만큼 신선하지 않은가? “한잔의 추억”을 봄여름가을겨울이 다시 불렀을 때 원곡에서 무엇이 그리 바뀌었던가? 김종진도 어디선가 얘기한 것처럼, 그저 그 기억으로 그렇게 부르자 음악이 되더라.

그렇다. 이게 한국 가요의 현실이다. 뭐 외국은 다르냐고? 다를 거 하나도 없다. 블루스는 비비킹에서 에릭 클랩튼으로 존 메이어로 자니 랭 손을 통해 지금도 꾸준히 그렇게 연주된다. 메탈리카가 롤링스톤즈를 서포트하고 AC/DC가 여전히 무대에서 그 음악을 짱짱거린다. 걔들도 늘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걔들은 30년 전 음악도 여전히 듣고 있고 가치를 찾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고 나면 새로운 음악이, 어제 음악을 유치하다고 비웃으며 나타난다. 근데 그 새로운 음악도 어제 음악도 실은 똑같은 놈들이다. 어디서 미국, 영국, 일본 노래의 화려한 효과들만 베껴다가 똑같은 곡에 덮어 씌운다.

Soul 뮤지션이 R`n B 뮤지션(그/그녀는 또한 Rock`n Roll 뮤지션이며 Blues 뮤지션이다)이고 그가 Hip-Hop 뮤지션과 연결되어 있음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하나 하나가 다 잘나서 지 혼자 깨달은 부처들이다. New Wave와 Synth Pop이 클럽에서 House로 또 그 MC와 DJ 손을 통해 Acid로 Electonica로 이어지는 것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애시드로 핌프록으로 재림하신 예수들이다.

30년이 훨씬 넘어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음악을 마치 새로운 무엇이 계속 나오는 냥 그렇게 살았다. 정권이 찍어 누르지 않으면 자본이 이어가면서 …… 오히려 우리의 음악은 겉 모양새만 화려해졌지 알맹이는 과거만도 못해지는 거 아니었을까? 돈도 안되는데 힘들게 음악하는 사라들에게 왜 더 음악 잘하지 못하냐고 욕하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묻고 싶다. 비틀즈에 꾸준히 감동하는 당신들, 귀 비우고 찬찬히 당신과 우리가 해온 것들을 다시 살펴 보라고. 도대체 뭐가 얼마 만큼 진보했는지. 아니, 최소한 솔직하긴 했는지.


영진공 헤비죠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고전적 주제의 재해석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부인이 아서 밀러의 딸이라는 얘기는 예전에도 언뜻 접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번 네 번째 연출작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

레베카 밀러 감독과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처음 만난 건 1996년 영화 <크루서블>의 주연 배우로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원작자 아서 밀러의 집을 방문했을 때라고 하는군요. 당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자벨 아자니와 몇 년 간의 동거 끝에 아들까지 둔 상태였고, 레베카 밀러는 몇 년 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하고 연출 데뷔작 <안젤라>(1995)를 완성한 직후였지요.




어쨌든 대중들에게는 항참 낯설기만 한 여성 감독의 새 영화를 위해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로 나서고, 이토록 많은 주연급 배우들을 조·단역에 캐스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죠. 대중적인 영향력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이 최강이겠지만 미국 내 문화·예술계 내부적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레베카 밀러 감독 커플 만큼 영향력이 강한 집안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편은 아닐 듯 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 피파 피(로빈 라이트)는 작가 출신으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을 거둔 허브 리(앨런 아킨)의 나이 차 많은 부인입니다. 영화는 피파 리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면서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요. 유명한 희곡 작가의 딸로서 성장했고, 유명한 배우의 아내로서 살고 있는 레베카 밀러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적잖게 투영된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 목표 없이 표류하던 피파 리(블레이크 라이블리)가 허브 리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정착지를 발견하게 되었던 그 순간, 유부남이었던 허브 리의 부인 지지 리(모니카 벨루치)가 눈 앞에서 권총 자살을 했고 그 이후 피파 리의 결혼 생활에 대한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해왔다는 부분은 그야말로 내밀한 고해성사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가 기승전결을 잘 짜맞춘 방식이라기 보다는 생각나는 데로 자유롭게 기술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은 시간 내에 꽤 많은 이야기와 느낌들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를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저처럼 로빈 라이트 – 작년에 숀 펜과 이혼하면서 더이상 로빈 라이트 펜이 아니로군요 – 를 평소에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로빈 라이트 연기 경력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피파 리로 출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얼마 전 <타운>을 통해 처음 알게된 배우인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그외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줄리안 무어, 모니카 벨루치, 마리아 벨로 등이 배역의 비중에 상관 없이 적재적소에 등장하며 반가움을 –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 더해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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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