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화려한 CG 속에 감춰진 빈약한 철학

하반기 영화계 최고의 화제작인 “아바타”가 개봉을 하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2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라서 많은 영화 팬들이 기다려왔고 또한 시사회 등을 통한 사전 입소문이 워낙 호평인지라 잔뜩 기대를 하고 보았다.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크게 나무랄 데가 없어보이는 이 영화 … 사실 오락영화로는 꽤 괜찮다 할 수 있지만 … 과연 그리도 호들갑스러운 호평이 쏟아질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단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화려하고 정교한 CG가 돋보이는 수준급 오락영화라고 해야겠다. 허나 이 영화에는 “걸작”이라든가 “혁명”으로 불리기에는 적절치않은 요소가 곳곳에 있다.


1. CG


3D로 구현되면 더 멋지다는 이 영화의 CG, 사실 2D로 보아도 이 영화 속 CG가 매우 멋지고 정교하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크게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엄지 두 개를 추켜세워도 무방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그 놈의 사실성이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물에서 CG가 사실성을 얻게되는 요인은 관객들이 그 CG를 자신의 경험이나 상상과 비교할 수 있는 어떤 레퍼런스가 있어서이다. 그 공간이나 배경이 제아무리 환상적이라해도 결국은 내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해도 납득이 가고 그럴듯할 때 우리는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그에 비해 만화의 경우는 그런 리얼함이 없어도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건 만화니까 …


이 영화의 CG는 그 점에서 뭔가 좀 메롱스럽다.


공간적 배경은 ‘판도라’행성이고 시간적 배경은 2154년. 이건 어디에서 어떻게 레퍼런스를 끄집어 내야할지 난감해진다. 무엇과 비교하여 이 CG가 리얼하고 정교한지 판단을 해야 할까. 그냥 환상의 세계니까 받아들이라고 우기면 어쩔수 없겠지만 그러기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와 은유가 현재 지구의 우리 현실과 매우 밀착되어 있으니 그저 판타지 만화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나비족이나 동, 식물은 “에일리언” 등의 영화에서 구현하는 완전 별종도 아닌 현재 지구의 인간 그리고 열대우림 속 생물들과 약간의 디테일만 다를뿐 거의 판박이들이다. 게다가 무기도 “매트릭스” 등에서 보아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전투장면도 기존의 영화들에서 본 것과 유사한 설정과 전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감독의 어떤 상상력이 CG를 통해 “영상 혁명”적으로 새롭게 구현된 건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못난 의문점 하나.


영화에서 CG의 존재이유 또는 지향점이 뭘까. 너무나 리얼하여 도저히 실사와 구분할 수 없는 경지인가. 진짜와 똑같아지려고 한다면 뭐하러 그러지 … 그냥 진짜를 쓰면 될텐데. 그리고 거기에 가면 더 이상 실제 배우와 물리적 특수효과는 필요가 없게 되는 건가. 실제의 배우와 특수효과는 고비용 저효율이라 기술로 그걸 어찌해보려는 건가. CG는 영화에 있어서 보조수단이어야 할텐데 왜 우리는 자꾸 그것이 마치 영화의 메인인 것처럼 취급하는지 의문이 든다.


2. 메시지 또는 철학의 허술함


제임스 카메론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틀이 잡히고 무르익은 감독의 메시지 또는 철학을 보고자 하는 건 무리인 걸까. 그러나 그의 대표작 중 “에일리언” “어비스” ” “터미네이터” 등의 작품에는 단순히 상업성을 위해 마구 지어낸 얘기 이상의 메시지가 담겨져있고 이는 관객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여전히 그 현재성이 건재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그의 작가로서 또한 감독으로서의 온전한 의도였는지는 “트루 라이즈”나 “타이타닉”같은 스펙타클형 오락영화를 보게되면 판단하기가 조금 애매해진다.


어쨌든 그에게는 그때 그때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화면과 느끼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시하는 특출한 재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작품 대부분이 상업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메시지들이라는게 줄곧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거나 매우 즉흥적인 것으로 느껴져왔고 실제 작품 내에서도 어물어물 버무려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해도 그 나름의 그런 재능을 억지로 깎아내리려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 매우 풀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풀 수가 없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화면 하나하나가 화사한 색감을 자랑하며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을 다루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주제에서 감독은 무협지식 악의 상징을 내세우고 모호한 선의 모습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하고 리얼한 CG를 구현하여 관객들에게 근사한 오락거리를 제공하고자 만든 영화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왜 굳이 이런 주제를 담으려 한 것일까. 차라리 잔혹한 외계생물체에 맞서서 싸우는 지구방위대 아니 행성연합방위대의 활약을 담을 수도 있고 인류에게 소중한 자원이 가득한 어느 행성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훈훈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도 있었을텐데.


환상의 세계에서 굳이 현실의 지구를 연상시키려고 애쓰는 이런 모습이 혹시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전 작품들에서 그저 어렴풋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선과 악의 문제, 또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 등이 12년 간의 세월 속에서 현실의 문제로 구체화되어서 나온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그는 2145년의 판도라를 현실 지구의 아바타로 형상화하려했던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와 지구촌의 현실에 대해 좀 더 깊은 고민과 사유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많은 영화와 도큐멘터리가 인간의 탐욕과 자본의 폭력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고, 많은 관객들도 이에 대해 공감하고 분노하고 고뇌하다가 마땅한 답이 없음에 안타까이 답답해했던 문제를 이런 오락영화에서 다시 들고 나와서는 어설픈 결말로 허탈하게 마무리 짓는 건 참으로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에  이 영화를 그럴듯하고 뭔가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주제를 양념 삼아 뿌려놓은 거라면 매우 실망스러울 터이다.


3.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 …


* 판도라의 상자는 다 아시다시피 한 번 열면 안에 있는 내용물이 다 튀어나오고 다시는 이를 주워 담을 수 없다. 행성 판도라의 미래도 마찬가지이다. 맨 아래 하수인을 물리치고 나머지 병력을 몰아낸다고 해서 과연 지구의 권력자들이 행성 판도라를 포기할까?

그럴리가 없다. 그들은 둘 중의 하나 또는 둘 다의 방식을 택하여 다시 올 것이다. 더 강력한 병력을 보내든가 아니면 평화사절단을 보내서 유화책을 쓰든가. 그리되면 나비족은 갈등하고 대립하게 될 것이다. 현실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투쟁을 주장하는 이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로 나뉘어서 말이다. 이건 우리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고 또 보고 또 보아온 과정이다.

그러다가 나비족은 소위 문명의 발달이라는 포장 안에서 지구인들처럼 탐욕의 존재로 변해 가거나 아니면 지구 고대 문명의 부족들처럼 멸망하든가 할 테고 말이다.


** “Unobtainium”, 즉 불가득물질이라는 말이다. 상용의 과학용어도 아니고 지구상에는 없는 상상의 물질을 비유하는 의미로 “터미네이터”에서 비슷한 용어가 나오기도 한다. 애써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자면 ‘울트라 짱 캡쑝 물질’정도 되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 명칭의 물질 때문에 지구에서 판도라를 침탈하고 나비족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되는데, 적어도 이런 중요 물질에 대해서는 그나마 물질의 용도에 대한 설명이나 의미있는 명칭이라도 붙여주는게 최소한의 성의는 아닐까.

*** “Karma(카르마)”라는 말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행위”를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업(業)”이라는 단어가 있다. 은근히 미국 쪽에 이런 걸 다루는 극이 많은데 “내 이름은 얼”이라는 TV 시리즈의 주제가 바로 이 카르마이다. 업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사람은 그 의도가 어떻든 나쁜 짓을 많이 하게 마련인데,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속죄가 있어야 죄가 갚아지고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도 어느 정도 카르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 의도가 좋든 나쁘든 판도라의 침탈에 관여한 중요인물들은 그 죄값을 치르게 하고 다시 태어나는 제이크는 새로운 삶으로 전이하여 승화시키니 말이다.

영진공 이규훈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최근 영화 두 편 + 1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2008) 에 이은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공포 영화 2편이 동시에 개봉됐습니다. 그런데 존 해리슨 감독의 <북 오브 블러드>(2008)와 안소니 디블라시 감독의 <드레드>(2009), 두 편 모두 메가박스 코엑스에서만 상영하고 있어서 마치 조용하게 치뤄지는 클라이브 바커 특별전을 보는 듯 하네요.

<드레드>의 안소니 디블라시 감독은 2006년 <데드 바이러스> 이후 클라이브 바커 원작을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의 제작을 줄곧 맡아오다가 결국 본인이 직접 각본을 쓴 <드레드>로 연출 데뷔작을 내놓게 된 인물입니다.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프로젝트들까지 전부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과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아주 푹 빠져서 살고 있는 모양이예요.

영화화된 다른 작품들이 초현실적인 설정 속에게 관객들이 공포를 체험하게 만드는 쪽이었다면 <드레드>는 공포 그 자체에 대한 한 연구라고 할 수 만큼 심리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클라이브 바커가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다루고 있는 공포라는 주제 그 자체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작품론에 해당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클라이브 바커의 팬인 안소니 디블라시 감독로서는 마땅히 자신의 연출 데뷔작으로 욕심을 냈을 법도 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드레드>가 내러티브를 무시한 형이상학적인 작품인 것도 아니고 안소니 디블라시 감독의 연출이 초짜들의 허술한 티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더군요. 원작과의 차이는 알 수 없지만 <드레드>는 심리 스릴러와 공포물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밀도 높은 서스펜스를 제공하고 있는 베리 웰메이드 영화입니다. 취향에 상관없이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만듬새가 빼어난 작품이라는 얘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드레드>에서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되는 두 명의 주인공, 퀘이드(숀 에반스)와 스티븐(잭슨 라스본) 중에서 누구의 입장에서 서느냐에 따라 영화는 심리극이 될 수도 있고 전형적인 호러물이 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6살 때 부모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도끼 살해를 당했던 퀘이드는 약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버티기 힘든 내적인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공포와 성욕이 뒤엉킨 나머지 누드 그림을 그린 후 남몰래 도끼 맞은 자국을 그림에 덧칠 해놓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퀘이드는 자신의 삶을 억누르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퀘이드로부터 공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를 제안받은 이후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영화학도 스티븐의 입장에서 <드레드>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공포물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닙니다.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던 한 인물의 광기로 인해 본인과 그 주변 사람들이 말 그대로 생지옥 같은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영화가 처음부터 스티븐의 입장에서만 진행이 되었다면 <드레드>는 그다지 특별할 일이 없는 평범한 공포 영화가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 물론 만들기에 따라서는 그러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 영화를 내놓을 수도 있었을테지만요.

하지만 <드레드>는 두 인물 모두, 또는 그 누구의 입장도 아닌 시점을 유지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관객 경험을 전달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드레드>는 공포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면서 전체적인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어느 연쇄살인범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퀘이드가 과연 연쇄살인범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퀘이드는 사실 영화 속에서 누군가를 직접 죽이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영화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드레드>는 타인을 각자의 트라우마 속으로 몰아넣거나 죽어가는 순간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미래의 괴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시나 타인에 대한 고문이나 가해를 통해 본인의 만족을 얻고있다는 점에서는 이미 괴물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요.


<드레드>(2009)와 함께 개봉된 또 한 편의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영화입니다. <북 오브 블러드>는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2008), <드레드>와 마찬가지로 클라이브 바커의 소설집 <피의 책>에 수록된 단편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개봉은 늦었지만 제작된 시기는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먼저였습니다. 포스터가 너무 징그러워서 감히 봐야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기왕 클라이브 바커 원작의 영화들을 보는 김에 마저 해치우자는 기분으로 챙겨보았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드레드>와 비교할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서스펜스를 창출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본격적인 심령 호러물로서의 으시으시한 면모가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만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점점 맥이 빠지는 듯 싶더니 막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이상의 활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담담하게(?) 끝나고 말더군요.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의 세계가 만나는 교차로 위에 세워진 집, 그 곳에서 죽은 자들의 원혼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일종의 채널로서 운명지워진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막상 죽은 자들의 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관객 입장에서는 피로 씌여진 그 책의 겉표지만 들여다보고 도로 물러나는 듯한 허전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산 채로 죽은 자들의 사연을 위한 책이 되다 못해 죽어서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년의 꼴사나운(?) 운명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애매한 결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원작을 영화화한 다른 작품,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이 불가사의한 지하철 연쇄살을에 대한 설명과 의미 부여를 초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납득시키고 <드레드>는 아예 초현실적인 설정을 최대한 배제하며 심리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선보이고 있는 반면 <북 오브 블러드>는 처음부터 본격 심령 호러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마치 전설의 고향처럼 마무리되고 있는 결말 부분 때문에 오싹한 공포 체험의 제공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관객들에게 마땅히 전달했어야 할 – 또는 완벽한 시나리오가 되기 위해 갖추었어야 했던 – 그 무엇인가를 크게 빼먹고 있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지가 않네요.

밤 늦은 시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도살 당한다는 내용의 영화에 진지한 관심이 갔을리는 없지만 – 제목부터 ‘한밤의 고기 열차’가 뭐냐고요 –;;;  –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필름2.0에서 다뤄준 기사를 통해 원작자 클라이브 바커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공포 소설은 제 관심 분야가 아닌고로 그다지 기억해둘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필름2.0이 그 기사를 다룬 태도에는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에 대해 우습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좀 더 알아본 클라이브 바커는 그냥 소설가가 아니라 <헬레이저>와 <캔디맨>의 감독이셨으니 이쪽 방면에서는 꽤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젊은 사진작가가 우연히 지하철에서의 연쇄 살인을 목격하고 그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설정은 그저 고루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에서도 지나치게 허술할 수 밖에 없는 면이 있죠. 지하철 살인마(비니 존스)의 활약(?)으로 인해 열차 안이 온통 피칠갑이 되곤 하는데 도대체 저건 어떻게 뒷처리를 하는 것인지, 왜 경찰은 밤 마다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는데도 적극적으로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 레온(브래들리 쿠퍼)은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한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은 이 모든 의문과 허점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한방에 해결해버리는 구조의 영화더군요. 물론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도살장 지하철이 여태 달렸던 것이고 언론이나 경찰이 모른 척 했던 것이며, 관객 입장에서도 그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져왔던 ‘그것들’은 영화 속에 보여진 모습만으로는 그저 상상의 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것들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작가의 의도와 함께 좀 더 나아가 작품의 가치 또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도시의 얼굴을 담고자 했던 젊은 사진작가가 끔찍한 연쇄 살인범과 마주치게 되는 계기는 유명한 갤러리에서 요구하는 특별한 사진을 얻기 위함이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숨겨진 도시의 진짜 얼굴과 마주치게 되고 자신의 삶도 바뀌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미드나잇 비트 트레인>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정한 공포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지켜져왔던 ‘그것’이란 결국 대도시의 숨겨진 속성, 인간 탐욕의 집단 의식 같은 것이겠지요. 그것이 없으면 도시도 없고 그것으로 인해 도시는 발전하고 존속된다는 사실. 때로는 대공황이나 재앙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암묵적 동의에 의해 근본 원인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다시 반복되도록 한다는 것.

최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관한 영화가 바로 <미트나잇 미트 트레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Clive Barker, UK / 1952 ~

영진공 신어지

강동원 흥행의 법칙과 영화 “전우치”


무조건 예쁘게 나오면 흥행 성공한다 …

… 라고 강동원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세 감독의 <형사>는 그래도 컬트팬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반면<M>이 그러지 못한 것은 강동원의 모습에서 대머리 기가 보였기 때문 …
이라고들 하죠.

물론 정말로 그에게서 대머리 기가 보인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 짧은 M자 머리가 보기에 살짝 부담스러웠던
거겠죠. 아직 꽃다운 ‘소년'(잘해봤자 ‘청년’)을 ‘어른 남자’로 그리는 것에 대한 반발감이라 해야 할까. 이 면에 대해선
이명세 감독님이 조금 “성격이 급하셨다”는 게 저의 해석입니다. 몇 년만 참으셔도 됐을 것을, 얜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다고요.

군대 갔다오기 전에 되도록 샤방하고 예쁜 모습을 많이, 라는 게 누나팬들의 공통된 심정이랄까.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난 듯,
어쨌든 공익 가기 전 마지막 작품이 될 <전우치>에선 강동원이 아주 예쁘게 나올 듯하니 다행입니다만.

전우치

아이고 저 표정 봐라, 우째 저래 이쁘노.

강동원이 예뻐서 <늑대의 유혹>도 앉은 자리에서 DVD 코멘터리로 보는 것 포함 두 번 정주행하고 장면
발췌보기로 또 돌려본 저라고는 하지만, 최동훈 감독이 처음에 강동원 데리고 <전우치> 찍겠다고 그랬을 땐 아니
감독님하 뭐 잘못 드셨나요, 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습니다.

모델에서 배우로 전업한 또래들 중에선 그래도 강동원이 의외로
연기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녀를 믿지 마세요>같은 영화에선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대작의
주연으로서는 아직 검증 안 된 것도 사실이죠. 거기에, 사실 최동훈 감독의 이전 두 작품도 보면 매우 능숙한 배우들에게 기댄
면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제자리에서 제 몫 알아서 똑소리나게
해먹는 배우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지요.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박신양도 그랬고, 조승우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백윤식 선생이나
김윤석, 이문식, 천호진, 주진모 …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에선 너무 잘하시는 백윤식의 연기를 오히려 살짝
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히려 살짝 삑사리가 났다고 생각할 정도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촬영이 끝난지 한참 지나서도 좀처럼 개봉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기자들 사이에서 영화가 영 안 나왔단 소문이
파다하기 돌았습니다. 물론 CG를 잔뜩 사용하는 영화들은 원래 후반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긴 합니다만, 대체로 후반작업이
길어지고 개봉이 늦춰지면 늦춰질수록 ‘본 촬영분이 나빠서 배급사에서 개봉을 미루며 덧손질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십상입니다. 이건 많은 영화들의 케이스에서 일정부분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했었으니, 100억이 넘게 들어갔다는
<전우치>에 대해 무성한 뒷말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제가 기대를 갖게 된 건 지난 번 제작발표회에 다녀와서(새 창으로 열기)
니다. 맛뵈기 동영상 속에서 강동원의 전우치는 매우 이쁠 뿐 아니라 발랄하고 유쾌했고, 임수정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뻤으며,
염정아는 얄팍해서 웃기지만 밉지는 않은, 오히려 귀여운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김윤석의 카리스마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감독이나 배우들의 자신감도 꽤 있어보였습니다. 최동훈 감독의 자신감은 봉준호 감독과는 또 다른 면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에요. 봉오빠가 등장할 때 제가 같이 들떴던 게 “드디어 한국에서도 ‘영화를 갖고 노는’ 감독이 나타났다”는
거였는데, 최오빠 역시 그렇습니다. 상영된 메이킹 장면들에서, 물론 힘들고 고민하거나 심지어 험악한 때도 많았겠고 그건 모두
잘라냈겠습니다만, 그래도 영화 만들면서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이 많이 보였습니다.

다만 조금 걱정되는 건
CG인데요. 맛뵈기 동영상에선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얼핏 보이는 CG의 수준이 약간 조잡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본편에서
색보정과 기타 다른 보정을 거치면 달라지겠으나, 예고편에서 드러나는 밤의 추격씬 화질도 다소 조악했고요. 물론 그런 거 보정하는
것도 후반작업 중 일부이고 제작발표 할 때에도 한참 CG 작업중이라고 했었으니, 본편에선 보다 나은 화면을 볼 수 있겠지요.

영화 <전우치>의 촬영현장

기사를 쓰기 위해 찾아본 전우치와 서화담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우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정사실인 것
같군요. 생몰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당대 여러 기록에서 전우치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고, 장난기와 유머가 가득한 선행의 기록도
있지만 치기와 악동의 기록도 꽤 됩니다. 남 골려주고 소소하게 복수해주고 상사병 걸린 친구 돕겠다며 정절 지키고 있던 과부
보쌈하는 행태까지 …

전우치가 “발라버리겠다”고 자신만만 찾아갔으나 오히려 된통 깨지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서화담이, 우리가
황진이와의 에피소드로 알고 있는 그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맞다는 사실도 매우 흥미롭지요. ‘리’는 개무시하고 철저한 주기론을
펼쳤다는 이 양반이 한편으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았고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신비술이나 동양적인 은비학,
도술에 관심이 컸다는 얘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랬던 양반이 영화 <전우치>에선 악당으로 나온다니 기분이
좀 묘하기도 하네요.

어쨌거나 <전우치>가, <타짜>때 쩍 벌렸던 제 입을 두 배로 더 쩍 벌리게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최동훈 화이팅!

영진공 노바리

연애를 실패한 그대에게 …

마그리트란 사람이 있어.

벨기에 노인넨데 20세기 초반에 살았지. 아마.

미친놈이야. 회화로 철학할 수 있는 건 미친놈들 밖에 없어. 미친 천재.

뭐, 난 존경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그림은 못그리니까.

현실이 과거가 되면 뇌는 과거를 포장하거나 왜곡하기 시작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이야.

하늘이 달을 품었건 나무가 달을 품었건 이유는 사라지고 현상만 남지.

자이가르니크 신드롬이 발현되는 시점이야.

그 뒤부터 과거는 넘사벽이 되는거야.

시발, 이를데 없이 완벽했던 사람.

공고한 벽을 치고 아무도 못기어오르게 하는거지.

30세 넘는 이성없는 인간들의 상당수가

20대 초반에 길고 좋았던 연애를 한 사람들이야.

그들만의 벽에 공구리 쳐 놓고 모든 사람들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이제, 연애, 훗. 끝인거지.

그렇게 될수록 기억은 더욱 왜곡돼.

이성이 별뜻없이 한 행동이 대뇌속에서는 과잉 포장돼.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움추리는 것처럼

기억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 상처였던 부분까지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속성이 있어.

그래서 흘러간 과거는 늘 아름다운 법이잖아.

문제는 이러한 과대포장된 과거를 현실에서는 넘을 수 없다는 말이지.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것, 본 적 없는 것, 볼 수 없는 게

혼재되기 시작하면 이젠 독신자용 80세 보장 특약보험(결혼시 파기) 같은 걸

가입해도 아무 상관 없어.

어차피 자신이 공구리 쳐 놓은 벽을 넘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간혹 그 비슷한 사람이 생겼더

라도 항상 비교하면서 살게 뻔하거든

둘다 불행해지는 거지.

현실의 알토란 같은 상대는 졸라 많은데 형이 만들어 놓은 신전은 저 위에 있으니

예수, 부처, 성모 마리아 아니면 그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거야.

언제까지 뒷통수만 보면서

징징거릴꺼야.

네가 바뀌지 않으면

     이 수많은 인간 중에

          누굴 잡아도 똑같아.

               인간은 다 똑같아.

                    거죽만 다를 뿐이야.

                         네가 바뀌지 않으면.

영진공 그럴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