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수다떨기 (1), 사랑에 대하여



6월 2일, 꼭 투표합시다!

2008년에 라디오 불교방송에서 잠깐 진행했던 코너
<금요스페셜, 장근영의 영화 속 심리학>을 글로 정리하였습니다.


 
======================================================================

Q. 오늘은 영화 속 심리학, -사랑-에 대해서 좀 알아보고자해요. 사랑타령, 어떨 때는 지겨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또 예술작품들, 상업품들이 ‘사랑’에 의존해 살고 있는데요, 인류사가 사랑의 역사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요. 이게 어떻게 정의 내리기가 참 어려운 거에요.

대중문화가 사랑을 애용하는 이유는 사랑이 다양하면서도 공감이 되는 감정이기 때문일 겁니다. 일단 사랑은 아주 센 감정이예요. 김현식씨가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에 웃고, 운다” 고 했쟎아요. 근데 그 사랑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숫자만큼의 사랑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만큼 다양한 것이 사랑이죠.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사랑이야기는 매번 결국엔 같은 내용이면서도 그때마다 다르죠.

-= IMAGE 1 =-

Q. 영화 속 사랑, 뭐 대부분의 영화가 러브 라인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어가는데요, 심리학에서는 이 사랑을 어떻게 접근하고 있나요?

심리학계에서 사랑에 대한 연구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사랑은 너무 당연한 감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연구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죠. 어쩌면 심리학자들이 좀 공부만 하고 정작 실생활에서는 별로 로맨틱하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르고요.
 
부모의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보울비라는 사람이 연구를 한 것이 유명하고, 그 외에는 스턴버그라는 학자가 사랑의 삼각형이라는 주제로 연구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의 색채학 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 이론을 제시한 “존 앨런 리”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로 알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알기로는 적극적인 동성애 커뮤니티 운동가라고도 하더군요. 어쨌든 존 리의 사랑 색채이론이 대중적인 인기가 많죠. 사랑을 세 가지 색채로 구분하고 그 색의 혼합으로 다시 세가지 색을 더 만들어서 모두 6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게 대부분의 사랑경험을 설명하기 딱 좋은 틀이거든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도 거의 모두 이 여섯가지 유형 중의 하나로 구분할 수 있어요.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 등장하는 좀 괴상한 사랑도 이 색채로 구분이 되죠.




Q. 영화 <게이샤의 추억>…치요가 어린시절 한 남자를 마주하고, 꿈을 ‘게이샤’로 바꿀만큼,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거는 그런 내용에 동양적인 미가 돋보이던 작품이었는데요….

솔직히 그게 말이 됩니까. 사랑을 얻기 위해서 기생이 되다니요.
물론 게이샤가 그 시대에 농부의 딸이 전문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는 점은 고려해야겠죠. 하지만 우리나라 기생도 사실 전문 예술인이었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서 기생이 된다는 이야기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사랑에 상처받고 복수를 위해서 기생이 되겠죠.

그러니까 <게이샤의 추억>은 “서양인이 오해한” 일본적인 정서에서나 이해가 되는 이야기죠. 어쨌든 영화는 그것도 사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랑은 존 리의 사랑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에로스 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로스 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행복 그 자체예요. 동화 속 주인공처럼 이상형을 운명처럼 만나서 그 후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마무리되는 사랑이죠. 치요도 어둡고 막막한 현실에서 잠깐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순간의 행복이 이후에 희망이 되고 동기가 됩니다. 언젠가는 꼭 그 아저씨를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해질거야. 라는 희망. 이게 치요의 사랑인거죠.


Q. 자신의 인생에서 꿈과 목표가 동기부여가 ‘사랑’에 의해서 원동력을 얻어서 그것들을 이루어가면 참 해피엔딩일건데, 또 사람 사는 일이 그렇지가 않을 때가 많죠. 그랬을 때, 사랑에 의한 파괴력 또한 어마어마하게 그려지는 영화들이 많죠….

원래 효과가 좋은 약들이 부작용도 무섭거든요.
사랑도 그렇죠. 특히 매니아적 사랑이 무섭습니다.
근데 이게 인과응보예요. 매니아적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처음에는 사랑을 하찮게 보고 게임 하듯이 남을 울리는 사랑만 하던 사람인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임자를 만나면 미치는 거죠. 게임의 본질은 속임수인데, 속임수와 열정적 사랑이 만났으니 의처증 의부증이 되는 겁니다.


매니아적 사랑의 예, 하츠모모(공리)


Q. 소개팅자리나 누구만나는 자리에 심리학 박사이기에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봐 사람들이 더 불편해한다던가 그런 거는 없나요?

십여년 전에는 정말 많이들 그랬는데, 요즘은 좀 덜 한 것 같아요.
누가 봐도 당연한 이야기를 해도 역시 심리학 박사는 달라… 이런 식의 반응을 받는 경우는 꽤 있죠. 근데 사실 제 경험에 따르면 실천에 강한 사람들은 이론을 파지 않는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니까 심리학을 하는 거 같거든요.


Q. 어떤 심리학에 의하면요, 첫 눈에 반하는 사람들, 보통은 콤플렉스와 콤플렉스의 만남일 경우가 많다고들 해요. 그러니까 소심한 사람은 좀 활달한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배려가 많은 사람을, 뭐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게 반하는 경우, 많다던데요?

물론 많죠. 그 이론의 원조는 플라톤일 겁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원래 인간이 너무 강해서 신을 위협했대요. 그래서 신들이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고, 그 반쪽들이 각각 남자 여자가 된거죠. 어쩌다 헤어졌던 나의 반쪽을 만나면 대퇴부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전기충격이 흐르고,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뭐 그런 얘기죠. 그런 경우를 상호보완적인 사랑이라고 하죠.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죠. 말씀처럼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런 사랑에 빠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그렇다면, 너무 완벽한 사람, 보기에는 멋지지만 사랑하기에는 좀 꺼려지는 사람 아닐까해요..뭔가 채울 것이 없잖아요.

왜 그런 사람들 있쟎아요.
너무 빵빵하게 가진 것이 많아서 선물을 해주기도 부담스러운 사람들.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더 해줄 게 없고, 어줍쟎게 해주다간 오히려 우스워질 것 같은 사람들. 
사실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거절에 대한 불안이예요.
내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이 “미안, 우리 오빠 동생으로 지내… ” 이러거나, 아니면 “뭬야? 감히 나를 뭘로 보고!” 이러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정말 심장이 제대로 찢겨나가고 입장 완전히 구겨지는거쟎아요.
그러니 상대방이 너무 대단해 보이는 것도 사랑의 장애가 되죠.

게다가 너무 문제가 없는 관계도 문제예요.
문제가 없다는 건 사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딱 그 이야기예요.


슬쩍 미스터 미세스 스미스로 넘어가고 …


Q. 집도 좋고, 차도 좋고, 직업도 좋고, 거기에다 외모까지 출중한 두 부부, 문제가 너무 없어도 문제인 그런 케이스네요. 너무 풍족한 세상에 불만이 쌓여가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위생가설이라는 게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 알러지가 문제인데, 이게 우리 환경이 너무 위생적이어서 그렇다는 가설이죠. 기생충에도 감염되고, 감기도 매년 걸려주고, 흙밭에서 놀면서 세균도 많이 접하고… 이러면 면역체계가 바빠서 딴 짓을 못하는데, 감염이 없어지면 면역체계가 할 일이 없으니까 이젠 자기 몸을 공격하는 바람에 알러지가 생긴다는 건데, 요즘 학계에서는 꽤 유력한 가설로 인정받고 있어요.

근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좀 그래요. 원래 사회관계는 전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거든요. 당연히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관계 라는 게 발전을 하기 마련인데 아예 문제가 없으면 오히려 관계 자체가 불필요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뭐하러 같이 살지? 이딴 의문이 생기고, 그냥 이혼이나 할까… 이렇게 되는 거죠.

이 영화에서도 브란젤리나 커플은 서로 너무 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해요. 서로 터치 안하고 부부로서 각자 할 일만 하죠. 그러다 보니 불만은 생기는데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고, 계속 속에서만 쌓이는 거죠. 하지만 나중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죽일듯이 싸우게 되고, 외부에서 큰 문제가 닥쳐오니까 오히려 다시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Q. 뭐 그렇다고 문제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뒤짚어서 지금 위기나 어려움에 부딪힌 연인이나 부부들, 함께 그 위기를 해결해가는 과정, 또 한 번 사랑을 확인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맞습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옛 말씀 틀린거 하나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인생의 필연이거든요.
중요한 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죠.

Q. 사랑, 사랑인가 아닌가? 고민하는 입장도 있을거에요. 워낙 친해져서 없으면 허전한데, 또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는 좀 뭔가 밍숭한, 우정에 가까운 그런 경우, 과연 어떻게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사랑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거라고 봅니다.
자기가 사랑이라면 사랑인 거고, 아니라면 아닌 거죠.
하지만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 중에는 정말 친한 친구에 가까운 사랑도 있어요.

일단 사랑의 기본은 “너밖에 없다” 입니다. 나는 너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하고 모두를 사랑해. 이따위 말은 그냥 헛소리죠. 모두를 사랑하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근데 친구 중에도 너밖에 없다는 친구가 있다면 그게 사랑일 수 있어요.
 
심리학자 스턴버그는 사랑의 핵심 요소는 열정, 친밀감, 책임의식 이라고 말해요. 그 중에 열정은 처음에 반짝 타올랐다가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사라지는데, 친밀감은 서로를 오래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축적이 되죠. 책임의식은 원칙 문제라 시간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고요. 처음에는 서로 애매하게 좋아하다가 시간이 지나도 나를 너만큼 잘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그래서 너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사랑이겠죠.

Q. 이게 처음부터 열정적인 사랑이라면 괜찮은데, 우정에서 비롯된 사랑은 마음에 열정이 있더라도 표현하기가 참 민망한 경우가 있어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나 <청춘 만화>, <우리, 사랑일까요?> 이런 류의 영화처럼 극적으로 헤어지거나 다치거나 하지 않으면요.

민망하다는 그 감정의 배후에는 용기의 부족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워서 계속 진짜 친구로 지내는 거죠. 이럴 때는 “밑져봐야 본전이지” 라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어차피 친구로 지내는데, 그냥 친구로 지내라는 말 듣는게 뭐 손해겠어요. 말씀하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도 마지막 순간 두 주인공이 “밑져봐야 본전이지” 라는 생각으로 들이대니까 해피엔딩 되쟎아요. 청춘만화 에서도 권상우가 망가질 대로 망가지니까 김하늘이 드디어 용기를 내고요.


슬쩍 청춘만화도 건드려 주고 …

Q. 그래도 이런 친구같은 관계, 꽤 멋진 사랑의 관계가 아닐까..하는데요?

음, 당사자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걸요.
뭐 원래 강건너 불구경이 보기는 더 좋지만 말이죠.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 주에는 어떤 내용으로 금요일의 시간 기다릴까요?

잔인성이 어떨까요. 최근에 관심을 받는 영화 중에 <추격자>라는 영화가 있는데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영진공 짱가

“별의 계승자 (Inherit The Stars)”, 하드SF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






저자: 제임스 P.호건
역자: 이동진
펴냄: 오멜라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자료를 수집해 가설을 세우고 증명을 하며 치열하게 이론을 정립해가는 과학자들의 모습은 마치 범죄사건을 풀어가는 탐정의 모습과도 같다. 달이라는 ‘밀실’에서 발견된 5만 년 전 우주 비행사의 시체(월인月人)를 놓고 과학자들이 모여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그래서 SF소설이지만 동시에 추리소설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 드라마 CSI에서 첨단 기기들을 이용해 범죄를 밝혀내듯 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고고학, 비교해부학, 진화론, 지질학, 천문학, 언어학, 수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들이 등장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과학이론을 도구 삼아서 미스테리의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어떤 음모도 저열함도 등장하지 않는다. 외계인도 치열한 전투도 없다. 오로지 지적 호기심에서 나오는 과학자들의 열정만이 있다. 작가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런 틀 안에서 흥미진진하며 긴장감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독자들에게 추리소설 특유의 지적인 유희를 선사한다.


역자의 지인이 ‘학회SF’라는 기막힌 비유를 내놓았듯 이 작품의 중심에는 과학과 과학자가 놓여있다. 이처럼 과학이 중심이 되는 SF소설을 하드SF라고 분류하는데 ‘별의 계승자’는 하드SF의 진수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드SF는 과학이라는 제약을 안고 출발 한다. 마치 훨훨 날아다녀야할 상상력에 과학이라는 추를 메달아 놓은 모습이다. 자칫 소설의 탈을 쓴 과학기술서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겨낸다면 개연성이라는 커다란 힘을 얻게 된다. ‘별의 계승자’역시 과학과 소설적 재미를 잘 융합시킨 결과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과학에 바탕을 둔 이론들은 작품에 설득력과 개연성을 부여해 주었다.

영문판 삽화

SF작가인 피터 와츠(Peter Watts)는 이런 하드SF의 어려움을 ‘하드 SF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란 물음으로 쓴 글에서 이야기했다.



‘..(중략)..그럴듯한 과학을, 인간형 외계인과 초광속으로 넘쳐나는 장르에서 과학이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나서는 도전이다…(중략)

이건 단장 5보격의 운율에 맞춰 구약을 다시 쓰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이것은 자의적인 목표일 뿐이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여러 제약 조건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평범한 이야기가 훨씬 간단할 것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최종 결과물은 품위 없고 보기 싫은 것이 될 수 있다. 이야기인 척하는 에세이와, 해설로 가득 차서 터질 것만 같고 빈약한 캐릭터로 허술하게 치장된 핵심 아이디어 같이 말이다. 이러한 실패에는 우리의 몫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성공했을 뿐 아니라, 이런 제약이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 어떨까? 최종 결과가 기적적으로 부자연스럽고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아닌 걸작이 나왔다면? 이건 마치 한 손을 등 뒤에 묶은 채로 전쟁터를 헤매었는데도 살아남은 것과 같다. 승리한 것이다….(중략)‘


[ 하드 SF 르네상스1 (행복한 책읽기, 2008)에서 발췌 ]


제임스 P.호건은 한 손이 아닌 두 손을 뒤로 묶은 채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영진공 self_fish






 


 


 


 

“클래스”, 다양성에 관한 고민과 질문의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 프랑스어로 된 원제목의 뜻을 찾아봤다. 원작 소설과 영화의 제목은 <Entre Les Murs>로 ‘벽 사이에서’라는 정도의 의미다. 그런데 영어 제목이 <The Class>로 붙여졌고 우리말 제목은 이것을 그대로 읽어 <클래스>가 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제목의 의미를 단순히 교실, 학교라는 뜻만 생각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다른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Class라는 단어는 ‘교실’을 뜻하기도 하지만 ‘계급’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봉건 사회의 특징이 바로 이 사회 계급이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계급이 해체된다고 –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투쟁의 과정을 통해 – 배웠기 때문에 ‘계급’이라고 하면 일단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를 보면 프랑스 중학생 교실에서 발견되는 계급 갈등, 특히 교사와 학생 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고를 일으킨 학생은 퇴학을 당하고 사건에 연루되었던 교사는 그대로 남아 내년을 기약한다. 원제목은 역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되는 ‘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좀 더 중립적인 느낌을 준다. 벽 속에 갖힌 존재로서 학생들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고 교사와 프랑스의 교육계 전체가 넘어서기 힘든 거대한 벽 속에 놓여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클래스>는 일정한 내러티브를 갖되 섣부른 해결책이나 낙관론을 펼치지 않는다. 프랑스어 교사인 주인공 마랭(프랑소와 베고도)에게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학생 에스메랄다(에스메랄다 우에르타니)가 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국가론>을 읽었다며 모두를 놀래키는데, <클래스>라는 영화는 <국가론>에 등장하는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답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며 현상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쪽이라 할 수 있다.

나로 하여금 영화의 제목에 대해 찾아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클래스>라는 영화가 가져다주는 결과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 보다는 – 그런 답은 애초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교육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며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이 영화가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술레이만(프랭크 케이타)이 퇴학을 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이 되지만 그 과정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 쉽게 치워지거나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그 사이에 놓인 현재가 있을 뿐이다. 담당 교사인 마랭이 야비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 한 편 측은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이 영화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다. 술레이만이 사라지고 남은 학생들과 어렵사리 화해의 순간을 가지며 마지막 수업을 끝내는 듯 하지만 그것으로 해피 엔딩인 것은 아니다. <클래스>가 쏟아내는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은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는 법이 없다.

한 편의 영화로서 기대되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 물론 재미도 나름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 오락성이라곤 참 없는 영화다. 요즘은 극영화 보다 더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들도 많건만, <클래스>는 극영화이면서도 의도적으로 정서적인 맥락을 최대한 배제하며 상당히 고지식한 다큐멘터리 필름 같은 느낌을 준다.

프랑스어 교사로 출연한 프랑소와 베고도를 제외하고는 출연진들을 전부 실제 교사들과 학생들, 학부모들을 캐스팅해서 채워넣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끼리 모여 노는 몇몇 장면들은 연출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기록 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건조한 화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도 <클래스>를 통해 본 로랑 캉테의 연출에 비하면 여전히 드라마틱한 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진지함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매일 부딪히며 살지만 아주 잊어버리곤 하는 현실 문제들에 대해 <클래스> 만큼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어 네이티브가 보았다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클래스>는 굉장히 리얼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그 프랑스 말을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토 나올 정도로’ 실컷 들을 수 있다. 통념 속의 학교, 영화 속에서 자주 다뤄지곤 하는 그 학교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곳은 차라리 전쟁터라는 느낌마저 준다.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고민이 많은 나라에 살고는 있지만 <클래스>는 ‘나는 당신들에게서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말하는 곳이다. 교육이란 무엇이고 공교육의 책임과 방법론에 대해, 그리고 학교 조직의 규율과 학생들과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과 그것에 대한 사회 체계의 수용 능력 등에 관해 수많은 질문 거리들을 남겨주는 작품이다.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리란 생각을 한다. <클래스>는 파리의 어느 학급에서 벌어지는 – 어쩌면 아주 흔한 – 상황을 통해 다민족, 다국적 국가의 통합과 발전, 나아가 EU와 세계 공동체의 통합과 발전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이다.

영진공 신어지

 

 

 

 

 

 

 

 

 

 

 

“하하하”, 18禁이 옳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아무리 유쾌하대도 관객이 꽤 들 영화는 아니다.
홍상수의 마니아가 분명 존재하지만 항상 그렇듯 폭발적 지지를 끌어낼 만큼 파워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나만해도 “하하하” 정말 좋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든 추천하기엔 주저되는 부분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거듭 될 수록 호기롭게 웃어젖히게 되는 그의 영화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거다. 지지리 궁상의 여자들은 사라지고 쿨하게 젊은 남녀를 딸 아들 삼는 초로의 여인과, 바람 피고 모텔을 걸어 나오는 애인에게 “업어 줄게.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래.” 라며 건들줄 아는 여성의 등장은 더욱이 반갑다.

영화는 하룻밤 섹스나 몰래한 키스 같은 일탈이 시각적으론 전혀 섹시하지 않더라도 야하게 느껴질 만큼 사건과 사고 속에 깊이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적으로 과장하지 않았지만 평범함과 일상의 사이를 넘나드는 에피소드는 꼭 남의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이 주인공을 들여다봄이 아닌 함께 빠져드는 황홀경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안하지만 지금의 소년소녀들에게 그의 영화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다. 갓 스물을 넘기고서 홍상수 영화를 보기 시작한 내가 그의 초기 작품에 대한 감흥이 미미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세상과 술을, 남자와 여자를, 그들의 관계 얽힘을 조금 더 알고 봐야 제 맛이다.

‘하하하’는 오래된 애인이랑 손 놓고 보며 제식대로 킥킥 웃거나, 설렘이 앞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상대와 데이트삼아 봐야한다. 다 본 후에는 ‘영화 좋았지?’ 같은 한 마디로 끝내기엔 무지 아쉬우니 ‘자! 한잔해! 건배!’ 를 위해 소주 한잔 하자며 어둑한 밤길을 걷는거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진정한 The End.


영진공 애플

“시리어스 맨”, 코엔 형제는 만들기만 하면 걸작이구나


어떤 소재의 영화를 만들더라도 코엔 형제가 만들면 걸작이 되고 그들 특유의 내음이 난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돌이켜 보면 코엔 형제의 영화들 중에서도 범작은 있었다. 하지만 <시리어스 맨>은 분명 잘 만들어진 축에 속하는 작품이다.

<시리어스 맨>은 67년 미네아폴리스의 유태인 커뮤니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코엔 형제 자신들의 어린 시절 추억담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들도 분명 히브리어 학교를 다니고 유대식 성인 예식을 치렀으리라.

코엔 형제의 작품들이 종종 삶과 종교에 관한 메타포를 암시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작품 전체의 메인 테마로 삼았던 적은 <시리어스 맨>이 처음이라 생각된다.

주인공 래리(마이클 스터버그)는 굳이 비교하자면 구약의 욥과 같은 인물이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안좋은 일들 – 아주 어처구니 없기까지 하다 – 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신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랍비들과 상담하지만 결국 답을 얻지는 못한다.

특히 영화의 결말은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불가역성을 강조한다.
궁지에 몰린 래리는 마침내 한국인 학생의 ‘미스테리한’ 뇌물을 받아들이는데,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는 바로 그 순간에 무시무시한 전화를 받는다. 래리의 아들 대니는 압수 당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20달러 지폐를 되찾아 더이상 친구를 피해 달아날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토네이도가 다가온다. 집 안으로 잽싸게 피해 달아나는 식의 방법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영화 도입 부분에 삽입된 단편도 결국 불확실성에 관한 이야기다.

굳이 메시지를 뽑아내자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건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는 바른 자세가 아니다. 정리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보여주시는 대로 받아들일지어다.

유명한 스타 배우도 없고 코엔 형제 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도 없다 – 물론 이것도 미국 영화니까 낯익은 배우 두어 명 정도는 나온다. 캐스팅의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건 간에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작품을 위해선 최상의 캐스팅이란 실은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흥행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을테지만 낯선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종종 아주 사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곤 한다. 낯익은 배우들이 주는 기시감이나 고정된 이미지가 배제되기 때문에.

코엔 형제 영화의 출연진들은 대체로 매끈한 스타급 주연 배우와 함께 굉장히 재미있는 조연과 단역 배우들로 구성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리어스 맨>은 스타급 배우가 없는 영화이니 만큼 출연진 전부가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희화화된 인물은 없지만 다들 이런저런 장기를 발휘하며 한 웃음씩 전해주신다.

소품 성격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 대신 아주 밀도 높은 연출의 내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미장센과 음악의 사용도 훌륭하지만 특히 음향 효과의 사용이 유난히 특출나게 느껴진다.

다윗이 밧세바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았듯이 래리가 이웃집 여인 샘스키 부인을 지붕 위에서 발견했을 때 샘스키 부인의 담배 태우는 소리가 거기까지 들려올 리가 만무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것으로 래리의 오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 어쩌면 뜻밖의 목표물을 발견한 남성의 능력이란 실제로 초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인지도. 그래서 이번엔 음향 편집 담당자의 이름을 찾아봤다. 코엔 형제와는 초기작부터 줄곧 함께 작업해온 스킵 리브시(Skip Lievsay)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로 장식했다. 그러고 보니 샘스키 부인 역의 에이미 랜데커에게서 그레이스 슬릭의 느낌이 난다.

감독, 작가, 프로듀서인 코엔형제(Joel & Ethan Coen)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