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바이스 (Miami Vice, 2006), “몹씨나 액쑌적인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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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는 그 이름만으로 품질 보증수표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다. <라스트 모히칸>을 시작으로 <히트>, <인사이더>, <알리>, 첫번째 HD 영화였던 <콜래트럴>까지 일관된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준다. 스케일이 큰 액션 영화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리들리 & 토니 스콧 감독과 유사하지만 <인사이더>와 <알리>는 마이클 만 감독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차별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TV 연출자 시절 자신의 히트작의 영화 버전인 <마이애미 바이스>는 그러나 TV 시리즈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전히 마이애미가 중심이긴 하지만 사실상 ‘월드 와이드 바이스’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로케이션 스케일이 방대하면서도 돈 존슨의 하얀색 여름 양복과 여유 있는 미소 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마이클 만 감독이 정색을 하고 만든 ‘몹씨 액쑌 영화’가 <마이애미 바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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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액션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콜린 패럴과 공리의 멜러 부분이었는데, 이로 인해 마이클 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애미 바이스>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라스트 모히칸>과 <히트>를 꼽아야지 싶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애미 바이스>는 마이클 만의 가장 성공한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최대한 답습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우 환영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콜래트럴>과 마찬가지로 필름이 아닌 HD 영화라는 부분이다. HD 촬영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이클 만 영화의 전작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시각적 충일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는 동안 여러 장면에서 ‘저게 그림이 필름이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일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하다. 일부 대중적인 장르 영화의 컨벤션은 충분히 눈감아줄만 한 수준인데 딱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와 콜린 패럴을 바라보는 ‘질투의 눈물 글썽임’과 그것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했던 부분은 좀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공리는 <2046>에서 장즈이의 열연을 무색케 했던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마이애미 바이스>는 공리와 콜린 패럴의 케미스트리가 뿜는 설득력으로 인해 ‘몹씨 액쑌 멜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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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엘리자베스타운>,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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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크로우의 영화는 언제나 청춘들의 성장 드라마다.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또 연출도 하고, 아내인 낸시 윌슨(락그룹 “Heart”의 기타리스트 라능~)과 함께 배경 음악을 골라 넣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재미있고 잘 만들어졌으며 생각해 볼만한 꺼리를 남겨준다. 감독 데뷔작인 <금지된 사랑>(Say Anything, 1989)을 시작으로 <클럽 싱글즈>(1992), <제리 맥과이어>(1996), <올모스트 훼이모스>(2000)까지 느긋한 호흡으로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좋은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바닐라 스카이>(2001)는 카메론 크로우의 필모그래피에서 정말 예외로 남게된 영화다. 자전적 영화였던 <올모스트 훼이모스>가 흥행에서 참패한 뒤, 1년만에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를 거의 번역하는 수준에서 급하게 리메이크한 영화로, 탐 크루즈가 페넬로페 크루즈와 염문을 뿌리는 동안 카메론 크로우는 옆에서 그야말로 연출만 했던 작품이다. 아마도 <제리 맥과이어>에서 좋은 팀을 이루었던 두 사람이 상부상조의 차원에서 기획했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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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온 <엘리자베스타운>에서 카메론 크로우의 새 주인공 드류(올랜도 블룸)는 글로벌 스포츠 의류 메이커인 머큐리사의 8년차 디자이너로, 자신이 만든 신발이 시장에서 참패를 하고 그로 인해 회사에 10억 달러의 손해를 입히며 해고를 당한다. <올모스트 훼이모스>가 10대 시절부터 음악 평론가로 활동했던 카메론 크로우 자신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엘리자베스타운>은 바로 <클럽 싱글즈> 이후 8년 만에 영화 작가로서의 경력에 있어 바닥까지 나뒹굴었던 또 하나의 자기 체험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럽 싱글즈>에서 캠벨 스코트도, <제리 맥과이어>에서의 톰 크루즈도 모두들 한번씩 크게 망가진다. 그런 이후에 사랑을 찾고 성장을 한다. <엘리자베스타운>의 올랜도 블룸도 마찬가지다. 전작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 며칠 간의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성찰에까지 도달한다는 점이다. 호텔에서 마주친 새 신랑의 말처럼, 삶과 죽음은 정말 종이 한장 차이다. <엘리자베스타운>은 죽음을 통해 발견하는 삶의 가치와 살아가는 방법들에 관한 영화다.


<영화 중 “Free Bird” 장면>

영진공 신어지

브이 포 벤데타, V For Victory, 승리의 V를 위해

 

2008년의 대한민국에 이 영화가 과연 무슨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공포와 증오

공포는 복종을 낳고 복종은 방조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종과 방조의 아래 어디쯤 어두운 곳에서는 증오가 함께 자란다.
공포의 원천에 대한 증오와 나에 대한 증오 그리고 공포 속에서 안주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증오가 뒤섞여,
정체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질기게 자라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어두운 곳에서 자라는지라 빛을 모른다.
빛을 모르니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줄도 모른다.
다만 그 증오는 터져버릴 때까지 차곡차곡 쌓이기만 할 뿐이다.

V는 증오이고 복수이다.
V는 눈 먼 증오이고 복수이다.

사랑과 믿음

증오는 파괴를 부른다.
되 갚아 줘야 하기에 부셔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포의 원천과는 공존할 수 없기에 뿌리까지 다 없애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포의 원천이 사라지면 증오도 함께 없어져야 한다.
증오가 새로운 세상을 대체할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은 사랑과 믿음으로 새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공포와 방조에 짓눌려 감겨있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려,
나와 남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시 싹 틔워,
너와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Evey는 사랑이고 믿음이다.
Evey는 힘겹고 어렵게 사랑과 믿음에 눈을 떠야 할 당신과 나이다.

V가 처음 모습을 보인 건 1981년 영국에서이다.

그 시절 영국은 197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수상의 자리에 오른 마거릿 대처가 혹독한 밀어붙이기로 사회 전반을 휘몰아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엄격한 도덕과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누진세를 폐지하여 긴축재정을 편성하면서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였고 거의 모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였다.

이러한 정책 실행에 따른 사회적 반발이 커지자 그녀는 1982년에 느닷없이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유발하여 국면 전환용으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노동조합과 끊임없이 대립하여 무력화 시켜나갔는데, 그녀의 재임기간 중 영국 내 최대 노조였던 석탄노조는 거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무참히 깨졌다.

경제부흥을 기치로 집권 11년 동안 공공분야에 대한 국고지원 대폭 삭감, 복지예산 대폭 축소, 공기업 민영화, 노조 무력화 등을 몰아붙이며 “철의 여인”이라 불렸던 그녀는 1990년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그녀에 대한 보수당 내의 강력한 반발로 물러나게 된다.

V는 대처의 집권 초기에 “대처리즘”의 음산하고 잔인한 내음을 감지한 Alan Moore와 Dave Lloyd의 만화를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7년 동안 10권 분량의 작품 속에서 V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공포와 증오로 대체된 사회에 대한 복수(Vendetta: 복수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를 감행하였다.

V의 출현 배경에 대해 Alan Moore는 1988년 캐나다 판 “V for Vendetta”의 서문 속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It’s 1988 now. Margaret Thatcher is entering her third term of office and talking confidently of an unbroken Conservative leadership well into the next century. My Youngest daughter is seven and the tabloid press are circulating the idea of concentration camps for person with AIDS. The new riot police wear black visors, as do their horses, and their vans have rotating video cameras mounted on top. The government has expressed a desire to eradicate homosexuality, even as an abstract concept, and one can only speculate as to which minority will be the next legislated against. I’m thinking of taking my family and getting out of this country soon, sometime over the next couple of years. It’s cold and it’s mean-spirited and I don’t like it here anymore.”

“이제 1988년입니다. 마가릿 대처는 수상 3선 임기에 들어섰고 깨어지지 않을 보수의 리더십은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신념에 차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막내 딸은 일곱 살이 되었고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 격리수용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사화하고 있습니다. 새로 조직된 시위진압 경찰과 그들의 말은 검은 투구를 쓰게 되었고 그들의 차량 꼭대기에는 회전하는 비디오 카메라가 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비록 추상적 개념이긴 해도 동성애자를 근절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다음 표적은 아마도 소수민족이 될 듯합니다. 나는 이, 삼 년 내에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려 생각 중입니다. 이 곳은 춥고 잔인한 기운이 가득하여 더 이상은 있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Alan Moore의 소회는 Evey가 살아가는 세상만큼이나 큰 공포와 증오가 짓누르고 있던 1980년대 당시 한국의 현실에 대입하여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그리고 지금은 2008년. V는 1981년의 우리가 아닌 2008년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1981년의 우리에게 V의 메시지가 공포를 이겨내는 증오의 힘과 공포의 원천에 대한 복수를 전하는 거라면, 2008년의 우리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을 전하지 않을까.

암울했던 시절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부정되던 공포를 이겨내고 증오의 힘을 모아 원천을 타격했던 동력이 Vendetta(복수)였다면, 이제 그 V는 사랑과 믿음을 원천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승리의 Victory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엔딩,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영진공 이규훈


잡담.
1.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Guy Fawkes는 실존인물이다. V가 쓰고있는 가면도 Guy Fawkes 가면이다. 그는 카톨릭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자 1605년 11월 5일에 의회 건물 지하에 폭약을 설치하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했으나 일당 중 밀고자의 밀고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혔고 얼마 후 처형되었다.

2. 원작 속 Norsefire 집단의 구호는 “Strength Through Purity, Purity Thorough Faith(국가의 힘은 순결성에서, 순결성은 종교적 신념에서)” 이지만 영화에서는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국가의 힘은 단합을 통해, 단합은 종교적 신념을 통해)”로 나온다.

[꼬방동네 사람들], 가장 훌륭한 데뷔작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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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영화포스터답다…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던 배창호 감독이 데뷔작으로 선택한 것은, 이장호 감독의 <어둠의 자식들>의 원작자인 이동철 씨가 쓴 또다른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판자촌 마을인 이 꼬방동네는 아침마다 하나뿐인 공동화장실에 길게 줄이 늘어서며 빨래터에서 팬티 한 장을 서로 내 거라고 아귀다툼을 하다 싸움이 나기도 하는 동네다. 이곳에서 검은 장갑을 낀 여인 명숙(김보연)은 매일 노름이나 하며 소일하는 한량 태섭(김희라)과 결혼해, 새아빠에게 반항하며 점점 삐뚤어져가는 아들과 함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던 명숙 앞에 그녀의 전남편이자 아이의 생부인 주석(안성기)이 나타난다. 택시기사로 변해있는 주석은 명숙과 서로 사랑해 결혼했지만 원래 직업은 소매치기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했던 명숙은 몇 번이고 그가 감옥에 갈 때마다 그를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에도 지치자 결국 꼬방동네에서 태섭과 재혼한 것이다.

아마도 이동철의 원작에서는 명숙과 태섭, 주석 간의 삼각관계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리라. 그러나 배창호 감독은 꼬방동네의 여러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들의 삼각관계를 영화의 중심으로 적극 끌고 나온다. 이는 아마도 시나리오 검열, 이후 완성된 영화의 검열이라는 이중검열제도가 존재하던 당시 검열의 칼날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다고 여겨진다(실제로 배창호와 이동철이 각색한 시나리오는 사전 검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 지시를 받았고,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제목마저 사용 금지를 당했다.). 다행히 완성된 영화는 해외상영 불가를 조건으로 무수정 통과를 하게 되는데, <꼬방동네 사람들>이 결국 멜러영화라는 장르의 틀로 만들어진 것은 검열의 결과이긴 했으나, 배창호 감독의 영화세계를 규정짓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후 그가 만든 영화들 역시 대체로 진한 멜러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명숙에 대해 접지 못한 사랑 때문에 계속 명숙 모자 앞에 나타나는 주석. 그리고 어쩐지 낯이 익은 주석을 의심하면서도 사람좋은 한량의 태도로 주석을 대하며 슬슬 찔러보는 태섭. 그 사이에서 조마조마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명숙. 영화는 이렇게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줄거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연 빛나는 것은 배창호 감독이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방식, 그리고 이들의 이런 갈등이 펼쳐지는 배경이 되는 꼬방동네이다. 아내가 힘들여 번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는 태섭은 사람좋은 너털웃음과 능글거리는 태도로 애교를 떠는,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이다. 제아무리 명숙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마초적으로 군다 해도, 주석 앞에서 자신이 무서운 사람이라며 폼을 잡고 허풍을 친다 해도, 그가 그렇게 과장된 폼을 짓고 있는 동안 드러나는 건 혹여 사랑하는 명숙이 결국 자신을 떠날까 봐 안달하는 두려움이다. 김희라는 이 태섭 캐릭터를 그 ‘육덕진(!)’ 몸으로 매우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술값으로 아내가 힘들여 본 돈을 슬쩍해 팬티 속에 숨겨놓고, 잔치 때 그저 신나서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그러다 주석과 대작을 하며 그에게 허풍을 치면서도 그 사이로 이 건달 한량의 두려움을 슬쩍 내비치는 솜씨가 너무 훌륭해서, 어릴 적 TV에서 주로 후까시를 잔뜩 잡는 조직 보스 역으로 낯이 익은 이 분이 이토록 연기를 잘 하는 분이었구나, 새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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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녀의 삼각관계가 영화를 이끄는 축이 된다.


한편 주석 역시 참 기구한 인생인데, 소매치기인 걸 숨긴 채 명숙과 결혼했다가 감방에 가는 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돌아온 뒤 마음잡고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항구에서 일을 하지만 전과가 있는 탓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소매치기 재범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인생이 더욱 꼬이게 된다. 그때까지도 기다려줬던 명숙이건만, 굶고 있는 자식과 아내 때문에 눈이 뒤집힌 그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가 잡히는 장면은, 정말로 지갑을 훔쳐야겠다는 일념보다는 차라리 잡혀서 인생 끝내고 싶다는 도피적인 절망감이 가득하다. 명숙을 꼬시던 시절엔 자신만만하고 철없어 뵈던 젊은 청춘이었던 이가 꼬방동네에 나타나 명숙과 7년만에 재회를 하는 현재 시제에서는 어느 새 깊고 어두운 우울과 고독을 눈에 가득 담은 30대가 돼 있다. 배창호 감독은 안성기 특유의 도시적 우울과 고독을 가득 안은 ‘걷는 모습’을 매우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가 미로같은 꼬방동네의 골목을 헤매며 명숙의 주변을 서성이는 장면이 주는 안타까움은, 보통 사람 좋아보이는 호인 인상으로 여겨지는 안성기의 얼굴이 실제로 깊은 도시의 우울을 근사하게 체현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됐는데, 배창호 감독의 말을 듣자하면 이 당시에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과연 이 시네마스코프 촬영은 우연히 꼬방동네에 왔던 주석이 명숙을 발견하고 뒤쫓는 장면, 그리고 명숙을 뒤따라가는,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너비의 좁디좁은 골목길 장면, 그리고 마을잔치 장면 등에서 매우 적절히 효과를 드러낸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정말로 빛을 발하는 장면은 이런 몹씬보다도 의외로 안성기나 김보연 같은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이다. 배창호 감독은 종종 시네마스코프의 가로로 절찍한 화면을 반은 인물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나머지 반은 후경의 (초점이 아웃된) 움직이는 사람들/물체들로 채워넣곤 하고, 이런 미장센은 <꼬방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이후 <적도의 꽃> 같은 영화에서도 반복되는 화면이다. 이런 장면에서 인물의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힘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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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출연한 공옥진 씨의 이른바 ‘병신춤’에 환호하는 마을사람들.


판자촌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고 힘겹게 만드는 당시 사회상을 세 남녀의 멜러영화의 틀로 그려낸 것이 과연 이 영화의 단점일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모를 비밀을 안고 있는 태섭뿐 아니라 주석과 명숙의 캐릭터를 통해 화려한 도시의 한 구석, 산동네의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가난하기에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낸다. 뿐만 아니라 배창호 감독은 이들의 삶을 그저 절망과 우울로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회갑을 맞은 마을 어른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돈을 각출해 마을 잔치를 열고 함께 즐기는 이른바 마을잔치 장면 등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그럼에도 따뜻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힘을 애정어린 눈길로 묘사해낸다. 늘씬하고 값비싼 명품을 몸에 두른 세련된 도시여인한테나 어울림직한 ‘삼각관계’를 판자촌의 검은 장갑 ‘명숙’을 주인공으로 펼치면서, 이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의 삶에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절망뿐 아니라 그럼에도 웃음과 사랑이, 춤이 있다는 것을, 그로인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2년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은 다소 “80년대 영화스럽다’ 싶은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한 시대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한 당시의 영화문법일 뿐만 아니라, 신인감독의 데뷔작으로서의 미숙한 부분이기도 할 터이다. 그럼에도 <꼬방동네 사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과 함께 가장 놀라운 데뷔작으로 꼽혀도 무방할 만큼 아름답고 능숙한 연출솜씨를 자랑하는, 소중한 작품이다.


영진공 노바리

<언브레이커블>, 슬픈 수퍼히어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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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식스 센스>(1999)가 흥행과 비평 모든 면에서 알찬 성공을 거두었던 탓에 M. 나이트 샤말란(본명 Manoj Nelliyattu Shyamalan, 1970년생)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더우기 <식스 센스>에서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과 특히 주연이었던 브루스 윌리스까지 다시 캐스팅해 빚어낸 연작이다 보니 전작의 성공에 너무 기대려 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경우 비평가들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극장가에서도 대부분 ‘기대에 못미친다’는 얘기가 나오기 쉽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를 만든 사람 자신이 앞에 써먹은 이야기틀에서 금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관계를 팀 버튼 감독의 두 작품 <배트맨>(1989)과 <배트맨 리턴스>(1992)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배트맨에 대한 팀 버튼 감독의 탁월한 재해석과 독특한 미술 감각은 <배트맨>을 당대 최고의 영화로 만들었었죠. 뒤이어 만들어진 <배트맨 리턴스>는 팽귄맨이라는 인물을 통해 팀 버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게 되면서 전작에 비해 좀 더 어두침침한 느낌을 주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이 두 번째 작품을 더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하면 저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처음 팀 버튼 식 배트맨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더 좋게 간직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경우가 있죠.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강원도의 힘>(1998) 말입니다. 이 경우에도 저는 <강원도의 힘>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더 좋게 기억합니다. 두 작품이 다 훌륭하지만 첫 작품에서 받은 충격의 강렬함으로 인해 두 번째 작품을 보게 될 때에는 좀 면역이 되어서 아무래도 약간 만만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요. 첫 작품을 보았을 때에만 해도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하며 영화의 높은 완성도 자체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워 했지만 다음 영화를 보게 될 땐 잘 만드는 건 어느새 기본이 되어 버리고 좀 더 새롭고 좀 더 충격적인 뭔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관객의 자연스런 욕심이자 속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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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줄거리에 관한 한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또 어떤 방식이든 영화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미리 갖게 하는 리뷰도 정말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게 될 관객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무척 해로울 뿐이라는 걸 저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언브레커블>의 경우 <식스 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막판 뒤집기라는게 있어서 배급사 입장에선 요즘 그 흔한 관객시사회조차 안가졌던 것이 잘 이해가 됩니다. <식스 센스>만 해도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야!’ 한마디만 듣고 영화를 보게 되면 이 영화를 통해 즐길 수 있는 것의 반 이상은 날아가 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이 영화 만큼은 대부분 보셨으리라 믿고 썼습니다.^^;)

매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언브레이커블>의 내용에 대한 홍보자료는 ‘대학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한 남자(브루스 윌리스)가 열차사고를 당하는데 함께 탑승했던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 와중에 자신만 털끝 하나 안다치고 멀쩡히 살아 났더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물론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심지어 사무엘 L. 잭슨까지도 소근소근 거리는 이 조용한 영화에서 특출한 카메라 워크와 배경음악을 사용해 관객들을 숨 죽이고 따라오게 만드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재능은 정말 대단합니다.

물론 영화에 대한 평가는 영화를 본 관객들 개인이 직접 하게 되는 것이죠. <식스 센스>의 경우 같은 초현실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보기에도 끔찍한 유령들이 출몰하여 관객들을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기 쉬웠던 반면 <언브레이커블>은 보다 지적인 재해석을 요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작과 비슷한 수준의 서스펜스와 반전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극장을 나설 때의 표정이 과히 유쾌하지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언브레이커블>도 참 재미있게 봤구요, 생각할 수록 더 깊은 인상이 남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슬픈 수퍼히어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