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사토시 감독의 인생철학



친구의 홈피를 보던 중 한 글귀가 눈길을 끌었다.  


“인생 참 별거 없다.


어릴 적부터 삶은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었고


무언가 특별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친구의 글이 종종 떠오른다. 나 역시 삶이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았다. 방황의 20대를 보낸 것도 결국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발버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은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 걱정, 가족 걱정, 돈 걱정을 하며 살고 있는 모습. 마치 어떤 관광지를 가던지 손가락으로 V 포즈를 하고 있는 여행사진들처럼 우리 모두는 배경만 다를 뿐 똑같은 인생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특별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모 기업가처럼 죄를 짓고도 어디 소풍 다녀오듯 사면되어 나와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는 것일까? 히피족처럼 바람따라 구름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일까? 타임지의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혀야 특별한 인생일까? 어떤 인생이 ‘특별’한 인생일까?




미키 사토시 감독은 이런 질문에 자신만의 확고한 답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지루하고, 무기력하고, 별 볼일 없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형 인간들이 주인공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특별한 것 없는 인생,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런 주인공들이 피똥싸는 노력 끝에 기사회생하여 인생의 대박을 얻는 성공 스토리를 그린 영화는 많다. 그러나 미키 사토시의 영화에는 그런 커다란 성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게 당신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리 없다는 듯 쪼잔하다 싶을 정도로 아주 작고 평범하고 사소한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5)
지루한 인생에 지친 전업주부 우에노 주리 양이 등장해서 주부 스파이로 활약한다.
영화는, 평범한 일상이라도 조금만 생각을 바꾼다면 이 세상은 정말 기똥차게
재미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텐텐(轉轉, 2008)
텐텐은 여기저기 정처없이 걷는다는 뜻으로 오다기리 죠가
잉여인간으로 나오는 작품이다. 자기 앞길을 찾지 못하고 청춘을 썩히고
있는 오다기리 죠와 부인을 살해해 도쿄경찰청에 자수하러 가는
빚쟁이가 함께 도쿄시내를 산책하며 경찰청까지 가는 로드무비(?)다.
우리가 사는 주변, 내가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그 안에서 일어났던 사소하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스턴트 늪(インスタント沼, 2009)
초현실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 편집장이 찌든 일상을 접고
골동품가게를 열기까지의 좌충우돌 이야기로 익숙했던 주변을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놀라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소소한 것들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미키 사토시 감독은 우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주변의 작은 것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라고 말한다.

그런 눈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 식물에 관심이 없는 이에게 산에서 자라는 풀들은 그저 잡초들의 집합일 뿐이다. 하지만 식물을 사랑하고 관심있게 이에게는 산에 있는 풀 하나, 나무 하나 마다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특별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대학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 이런 식으로 삶을 단순화 시키는 것은 모든 영화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단순해 보이는 나의 하루, 나의 한달, 나의 일년이지만 그 안에서 특별한 당신과 만나고 특별히 햇살 좋은 날도 있고 특별히 재수없었던 날도 있다.

오늘따라 매끈하게 유선형으로 깎여진 손톱이 맘에 들고 뫼비우스의 띠 처럼 묶여진 농구화 끈을 보며 오늘따라 자유투가 잘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특별한 삶이란 다름아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한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은 단지 지금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해주는 일 것이다.


덧붙여.


국내 팬들 사이에선 일본의 장진 감독이라 불리는 미키 사토시 감독은 장진 감독처럼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초현실스런 사건과 인물들의 묘사, 그 인물들이 주고받는 중구난방 동문서답의 대화들로 아주 유쾌한 영화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장진 감독의 영화에서 정재영과 장영남씨처럼 미키 사토시 감독의 영화에도 터줏대감들이 있다. 그들은 이와마츠 료와 후세 에리라는 배우인데 이 둘은 거의 항상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이와마츠 료와 후세 에리. 사진만 보고 있어도 절로 유쾌해진다.

영진공 self_fish

 

“인 디 에어”, 우리 인생의 공허한 숫자들에 관하여


내겐 올해의 첫번째 만점 영화. 영화로서의 안락함과 놀라움을 모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릴 적 영화를 처음 좋아했었던 이유들 – 예전엔 미처 몰랐던 신세계로의 간접 체험과 좋아하는 배우들을 볼 수 있다는 등의 즐거움 따위 – 로 가득한 영화다.

캘리포니아의 와이너리로 관객들을 느긋하게 안내했던 <사이드웨이>(2004)와 냉소적이며 비극적인 유머가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던 <아메리칸 뷰티>(1999)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하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수입/배급사인 CJ엔터가 국내용 제목으로 ‘마일리지’를 내정해놓았다가 철회하는 일이 있어 빈축을 샀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 내용과 크게 무관하지 않은 제목이긴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인공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은 해고 전문 인사 컨설턴트로서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 내 공항과 호텔에서 생활을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절정의(?) 미중년 라이언이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천 만 마일의 항공사 마일리지를 돌파해서 세계에서 열 몇 번째에 해당되는 클럽 회원이 되는 것. <인 디 에어>는 결국 마일리지 쌓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라이언의 이야기이고 이것은 다시 허공 위의 다른 무언가에 의미를 두고 사는 현대인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항공사 마일리지는 고객 로열티 프로그램의 대명사다. <인 디 에어>에는 그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고객 차별적 서비스 행태들이 나오곤 하는데 이는 영화 속에 나름 풍자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만한 부분이 된다.

길게 줄지어 서있는 일반 고객 대상 데스크 옆에 열받게시리 하루종일 비어있는 프레스티지 회원 전용 데스크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 마침내 라이언이 받게 되는 천 만 마일리지 클럽 회원 카드는 메탈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데 국내에서는 모 카드사의 연회비 60만원짜리 카드가 이를 벤치마킹한 바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회원들이 일반 플라스틱 카드 무게의 3배 정도인 금속 카드를 열심히 갖고 다닌댄다. 그야말로 Up In The Air의 삶을 위한 표지판인 셈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직업이지만 고용보장이 되지 않는 미국에서 해고 통보와 재취업 상담을 해주는 일은 회사의 인사 부서에서 아마도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일인지라, 그리하여 오늘날 라이언 빙햄과 같은 인물을 탄생케 한 것이리라.

최근의 뉴욕발 금융 위기와 경제 불황으로 이러한 특수 직종이 때아닌 호황을 맞이했더라는 설정은 – 월터 컨의 원작 소설은 2001년 7월에 첫 출간이 되긴 했지만 – <인 디 에어>가 관객들의 현재와 함께 호흡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셀던 터너와 공동으로 각색 작업에 참여한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은 컨설팅사 사장의 대사에 단 한 마디를 추가하면서 큰 효과를 얻어냈다. “지금이 바로 우리에겐 기회입니다”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기회를 얻기도 하지만 위기를 맞기도 한다. 100만 마일리지 고지를 눈앞에 둔 라이언에게 신입사원 나탈리(안나 켄드릭)의 제안은 – 퇴직 상담을 화상통화 시스템으로 대체해서 막대한 출장 비용을 절감하라! – 공항과 호텔을 오가는 라이언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려는 음모에 가깝다.

그러나 이야기의 구조상 가장 큰 갈등 요인이 될 수 있었던 나탈리의 제안은 파트너급 컨설턴트인 라이언이 나탈리를 데리고 다니며 퇴직 및 재취업 상담 실습을 시키는 과정에서 의외로 쉽게 해소가 되고 만다 –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일반적인 헐리웃 코미디나 멜러 드라마들로부터 <인 디 에어>를 크게 달라지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라이언은 나탈리와 얼토당토 않는 소동극을 연출하지도 않고 연애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교과서와 강의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탈리의 성장을 돕는 멘토의 역할을 하게 된다.

안나 케드릭이 연기한 나탈리는 정말이지 아무도 안보는 곳에 데리고 가서 몇 대 쥐어박고 싶은 밉상 캐릭터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10년 전 리즈 위더스푼이 욕심을 냈을 만한 배역이 아니었을까 싶은 이 나탈리라는 인물은 <인 디 에어>라는 인생 극장에서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도 한다. 이 역시 ‘아카데미를 제외한’ 여러 시상식에서 각색상 트로피를 들어올린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재능이다.

조지 클루니는 <ER>(1994)의 젊은 소아과 의사로 출연해 전세계에 그 명성을 떨친 바 있던 특유의 살인 미소를 오랜만에 되찾은 듯 하다.

<ER> 이후 조지 클루니는 좋은 배우로서, 그리고 존경할 만한 영화인으로서의 행보를 걸어오긴 했지만 다분히 대중적인 캐릭터를 요구했던 초기 출연작들에서의 인물상과는 점점 멀어지면서 사실 영화팬 입장에서는 그닥 즐거움을 선사해주지는 못했던 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인 디 에어>에서의 조지 클루니는 오랜만에 매력적인 입체감을 뿜어내는 좋은 연기를 선보인다. 그런 주인공 배우의 매력 발산이 있기에 영화 말미의 스산함이 그토록 선명하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베라 파미가의 ‘뇌리에 사무치는’ 노출씬은 안타깝게도 대역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베라 파미가가 정상 컨디션이었을 때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대역을 쓴 것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베라 파미가는 <15분>(2001)에서의 – 아, 그러고 보니 앤디 워홀의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15분 동안 유명인이 된다”는 말에서 따온 제목이었구나 – 매우 불쌍한 동유럽계 불법 이민자 역할이 첫인상이었고 그 이후로 제대로 본 출연작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인 디 에어>에서의 베라 파미가는 아니 원래 영어를 그렇게 잘 하셨던 건가요, 묻고 싶게 만들 정도로 매우 유창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튼 훌륭한 캐스팅이었고 그 역시 <인 디 에어>라는 인생극장에서 또 하나의 인생이었던 동시에 영화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핵심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라이언과 알렉스(베라 파미가)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인 디 에어>라는 영화 전체의 격조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생각지도 못하게 굉장히 훌륭한 카운터 펀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나는 좌석에서 몸이 10cm 정도 잠시 뜬 채로 박수를 친다. 인 디 에어드.

<인 디 에어>를 보면 <주노>(2005)를 통해 발견된 재능이 아카데미 각본상을 거머쥔 디아블로 코디 혼자만의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다름아닌 <땡큐 포 스모킹>(2005)이다.

George Clooney와 감독 Jason Reitman

영진공 신어지

“구하라”, 당신이 알고있는 그녀가 아니다.







  
독립영화계의 신 장르, 인디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의 쇼케이스가 지난 주 카페 ‘가화’에서 열렸다. 100% 온라인으로 유통 중인, 한번 보면 무조건 중독된다는 윤성호 표 5분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를 소개하고 알리는 자리.

원래대로라면 미니 언론시사회 정도로 제법 근엄하게 진행됐을텐데, 신선한 프로젝트인 만큼 딱딱한 것들 떼어놓고 캐주얼한 분위기로 수다도 떨고 공연도 즐길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하루의 끝에서도 여전히 끼와 재치로 똘똘 뭉친 감독과 배우들의 어색해서 더욱 유쾌했던 입담이 귓전에 맴돌았다.

쉬이 잠들지 않아 한번더 인디시트콤 에피소드를 훑고도 갈증이 나 자매품까지 보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덕분에 꿈자리는 요란한 발랄함의 연속이오, 웃으며 눈뜨는 아침은 한결 가뿐했다.

이토록 설레게 만드는 ‘구하라’씨를 아직 모르신다면 여기를 바로 클릭해 주세요.




영진공 애플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1편 ‘두근두근 오디션’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1 두근두근 오디션 from indiesitcom on Vimeo.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2편 ‘두근두근 김하나’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2 두근두근 김하나 from indiesitcom on Vimeo.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에피소드 3편 ‘두근두근 홍어드립’


indiesitcom 할수있는자가구하라 Episode 3 두근두근 홍어드립 from indiesitcom on Vimeo.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썩 박민규의 팬인 것은 아닌지라 사실 살까 말까 몇번 망설였던 책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나는 이 책이 박민규 특유의 ‘판타지’책이 아닐까 싶어 사기를 망설였는데, 누군가 ‘연애소설’이라고 알려주어 사게 되었다. 그리고 주말 내내 몇번을 여기 저기 발췌해 읽을 만큼 나는 이 책이 좋았다.

박민규 소설은 약간 나는 선호를 두게 되는게 “카스테라”같이 상징이 강하고 판타지가 가미된 것보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방금 수퍼스타스. 라고 표기했다가 고쳤다) 마지막 팬클럽”같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배경과, 땅에 발 붙이고 있는 상징이 있는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우주적 농담’은 한 두번은 웃을만 한데, 장편소설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암튼, 표지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만 보고, 나는 또 ‘우주적이면서 고딕적인’배경의 거대한 농담을 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내용은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는 그 배경, 제대로 묘사되었다고 믿겨지는 그 시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에 그만 확 빠지고 말았다.

사람마다 감상은 아마 다 다를 것이다. 연애담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자기 연애랑 비슷하면 더 감동받기 마련이고, 더 감정이입 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얼마나 자기의 연애를 소환해 내느냐가 소설의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 하니까. 게다가 … 내가 남자들이 쓴 첫사랑이나 연애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작가들의 연애담은 소영웅의식이나, 자기연민이나, 모성결핍을 지나치게 벌리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처음 도입부에서 주인공 남녀의 선배인 ‘요한’의 현학적인 잘난척이 장광설로 늘어질때는 아 … 이거 데미안 류의 지루한 성장동화인가.(난 데미안 싫어한다) 하고 의심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똥철학을 엄청 읊어대지만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고 자위적인 성찰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화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그 연애가 다시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자기연민이나, 본능에의 천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주변의 상황을 다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사람하는 그 사람들끼리의 얘기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 문단을 다 쓰고 보니, 내가 참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대부분 스토리를 즐겨보고, 어떤 묘사나 글귀를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그 글귀를 옮겨적거나 하지는 않는 편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너무 많다. 책을 늘 들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좋아하는 글귀들을 여기 블로그에 옮겨놓고 생각날때마다 온라인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모리스 라벨과 밥 딜런을 좋아하고, 미셸을 좋아하고, 선인장 꽃과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는 여자애들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 나 오늘 이뻐? 그래 이뻐. 토요일날 행사장에 와 줄거지? 아니 안가. 흥 나 삐진다. 일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날 안 오면 절교야. 한번만 봐줘. 정말 집에 일이 있다니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 이를 테면.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p171)

신의 선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일 거라,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서서히 회전을 멈추던 두 마리 목마와, 땅으로 돌아와 서로의 손을 잡던 두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돌아서 한참을 걸을 때까지 서로의 등에 묻어 있던 색색의 불빛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세계를 달려갈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까지도… 그때의 불빛들이 숨 쉬듯 깜박이며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한 짝씩 이어폰을 나눠 꽂았다.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p202)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28)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준 빛이 있는 한…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끝끝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p289)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p301)

곳곳에 배경음악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것으로 ‘하루키적’이라는 평도 많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배경음악을 지정하기 시작한게 하루키라 하더라도 난 박민규쪽의 선곡이 훨씬 맘에 든다. 마치 내가 이응준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것 처럼. 이응준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의 장소묘사와 배경음악묘사가. 가끔은. “이 남자 내가 사귀었던 남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소설가 이응준님 용서하세요. 그럴리가) 내 취향과 비슷하고 눈과 귀에 착 감긴다.

스토리 자체보다도 배경과 음악이 익숙해서도 소설을 좋아할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해 보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에게 참 좋은 소설이다.

영진공 라이

영화로 수다떨기 (2), 잔인성에 대하여



Q. 지난 주에는 영화로 보는 ‘사랑’에 대한 심리, 다각도로 알아보면서 재미있는 시간 가졌는데요, 이번 주 주제는 ‘연쇄살인범의 초상’입니다. 그냥 살인범이 아니라 연쇄 살인범, 꼭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게 더 잔인한데요?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는 크게 대량살인과 연쇄살인이 있습니다.
대량살인은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같은 경우입니다. 단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죠. 이런 대량살인은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입니다. 자기감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살인이라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 감정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거죠. 대량살인은 대개 한번으로 끝납니다. 사건과 함께 범인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건 비록 끔찍한 살인 범죄지만 어느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도 가끔 확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가 있쟎아요.

근데 연쇄살인은 대량살인과는 전혀 달라요. 연쇄살인자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예요. 흡연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살인을 끊지 못하는 거죠. 살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초기에 잡지 못하면 은폐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능적인 연쇄살인자로 발전하죠. 물론 절대 자살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단서를 남겨두거나 자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Q. 참 끊임없이 매력적인 영화 소재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이 그 그물망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감과 함께 스릴도 있는, 그리고 주로 실화여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라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나..하는데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 뭐라고 보시나요?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겁도 많고 차분하고 조심스러운데 사람 죽일 때만 무자비하거나, 명랑하고 쾌활한데 바로 그런 쾌활함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 왜 <추격자>에서도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정과 망치를 들이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 이러면서 달래잖아요. 전혀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인거죠.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그래요. 그는 무자비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인기를 얻었죠. 실제로 테드번디라는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쇄살인자는 팬클럽까지 있었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Q. 연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떠오르는 건 <살인의 추억>과, <양들의 침묵>, <공공의 적> 등이 떠오르는데, 장박사님은 어떤 영화들 기억나나요?

저는 <행복했던 여자> 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91년도 영화인데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골디 혼과 <나홀로 집에>의 자상한 아버지로 익숙한 존 허드라는 배우가 주연인데, 처음에는 이 남자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좋은 남편으로 나와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죠. 그래서 전 이 영화를 행복했던 여자가 남편을 잃고 고생하는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줄 알았던 그 자상하던 남편이 사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병질자였던거예요. 그런 줄 모르고 봐서 더 무서웠어요.


골디혼만 보고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벌벌 떨며 봤던 영화, “행복했던 여자”

Q. 연쇄살인범, 악취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쇄살인자의 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존 더글라스 라고 프로파일링 기법을 창시한 FBI의 심리분석관이 쓴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연쇄살인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릴 적에 야뇨증, 동물학대, 방화 중 한 가지를 꼭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 경험이 있다고 전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분명해요.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연쇄살인자 에디 게인은 자기가 살해한 시신들을 마치 짐승 사냥한 것 처럼 해체해서 집안에 여기저기 걸어두었대요. 마치 사냥한 사슴이나 호랑이 머리를 벽에 걸어두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걸어둔 거죠. 근데 또 그 사람이 붙잡혀서 감옥에 있을 때는 아주 착한 모범수였다고 하더라구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인거죠.


더글러스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Q.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한데요, 이미 그들에겐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겠죠? 연쇄살인자의 동기도 그러고보면 딱히 원한이나 복수가 아닐 때가 많아요?

대부분의 상식적인 살인은 동기가 있죠. 원한이나 치정 같은 거요. 그래서 살인범죄의 7-80프로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해요. 이런 살인범은 정황증거나 원한관계를 뒤지다 보면 결국 잡혀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그러쟎아요. 대한민국은 땅이 좁아서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결국 잡힌다고. 근데 연쇄살인범은 달라요. 이 작자들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원한 같은 게 원인도 아니고요.

Q.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에 비롯된 난국 영화 <추격자>에서도 잘 나타나죠. 이미, 범인은 밝혀졌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이밍과 정확한 물증 확보 지연으로 피해자가 더 생겨요. 아주 안타까운 경우였어요.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설정이니까 영화가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초반에 딱 잡혀버리면 단편영화 되고 말쟎아요. 재미도 없고.

Q. 이런 류의 영화를 보다보면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 속 범인들,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나 운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쇄살인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기에 잡힐 겁니다. 덕분에 그들은 연쇄살인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잡혔으니까.

근데 가끔 초기에 안 잡히는 인간들이 나와요.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거나, 너무 외모가 멀끔해서 의심을 안 받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인간들이 범죄를 반복할수록 기술이 늘고, 그러다 보면 갈수록 더 잡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소질도 있고 기술도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라 상식에 의존한 수사로는 오히려 잡기가 힘들어요.

영화 <추격자>에서도 설마 집 마당에 시체를 파묻으랴 했지만, 정말로 집 마당에다 파 묻었잖아요.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가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니까 의도하지 않게 허를 찌르는 셈이죠.

Q. 영화 <추격자>의 독특함! 아마, 살인마 영민에게 관객의 연민을 부추길 만한 어떠한 살해동기도 부여하지 않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해요. 보통은 살인범에게도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들지 않더라구요?

그렇죠. 영화를 보면 이 영화 감독이 연쇄살인범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요. 영화에서 보면 경찰 조서에 범행동기가 없으니까 서장이 채워넣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연쇄살인자들은 특별히 동기랄 게 없거든요. 동기 없는 범죄에 동기를 묻는 불합리를 지적한 거죠.

이렇게 억지로 동기가 뭐냐고 묻다 보면 “컴퓨터 게임 때문 이예요 … 호환마마처럼 나쁜 영화를 봐서요 … 어린 시절의 심리적인 충격 어쩌고 하는 식의 변명들이 나오는 거죠. 그럼 괜히 게임회사 폭탄 맞고 … 사람 죽인 걸로도 모자라 두루두루 폐를 끼치죠.


프라이멀 피어 …

Q. 그리고 보통, 형사들이 더 험악하고, 이들은 참 꽃미남인 경우가 많아요.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씨나, <추격자>의 하정우 씨,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모두 전혀 험악한 인상이 아니죠?

영화에서야 대비효과나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캐스팅을 할테지만, 실제 세상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얼굴 험악한 사람들이 의외로 순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만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니까 성격까지 험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은 정 반대죠. 실제로도 연쇄살인자들이 순하고 연약해보이거나 잘생긴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경계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면 오히려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힘들쟎아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그러니까 표정에 구김살이 없어요. 그래서 모르고 보면 좋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 꽃미남을 조심하라 …

Q. 그러면 이런 연쇄살인자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뇌의 작동방식 부터 조금 다르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념이나 국가나 종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대량살인이 저질러져왔거든요. 즉,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살인자의 본능이 있는 셈입니다. 그 본능은 언제 눈을 뜨냐 하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때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자도 그렇잖아요. 연쇄살인자들은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사람도 짐승취급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공감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연쇄살인자와 크게 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공감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인간성 역시 확장될 겁니다.

불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죠. 즉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날벌레 한마리와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마음을 가지곤 해요. 집에서 키우는 개와도 공감하고, 고양이나 새와도 공감할 수 있죠. TV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인 겁니다.


이때 이야기를 기초로 쓴 추격자 평 -> 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60810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연쇄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기다려볼까요?

초능력이 어떨까요? 최근에 개봉한 <점퍼> 라는 영화나 <데스 노트> 시리즈도 모두 초능력에 대한 것들인데, 이것도 우리의 심리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주제거든요.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