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시간”, 예상된 결말이지만 지루함이 없는 연출





퀀틴 타란티노 감독이 영원한 <펄프 픽션>(1994)의 그 감독이듯이 – 누군가에게는 <저수지의 개들>(1992)일 수도 있겠지만 – 대니 보일 감독은 영원한 <트레인스포팅>(1996)의 – 물론 <쉘로우 그레이브>(1994)가 먼저이긴 합니다만 – 그 감독입니다.

개인적으로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대니 보일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헐리웃에 진출해서 만든 <인질>(1997)과 <비치>(2000), 두 작품도 모두 좋아합니다. 두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고 이후 대니 보일 감독은 헐리웃을 떠나 조용히 영국으로 돌아왔죠.
당시 세간의 평가는 단순히 대니 보일 감독이 헐리웃 진출에 실패했다는 거였습니다만 지금 돌이켜보면 궁합이 잘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게 되었죠.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 대니 보일 감독은 본업인 TV용 영화 두 편을 연출한 뒤, 단돈 8백만불을 들여 만든 <28일 후…>(2002)를 통해 좀비 영화의 트렌드를 완전히 바꿔놓았고, <밀리언스>(2004)와 <선샤인>(2007)을 거쳐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 노려볼 수 있는 모든 트로피와 찬사를 한꺼번에 거둬들이는 성과를 이뤄냈지요 – 덕분에 한 편의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감독 협회, BAFTA,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모두 상을 받은 7번째 감독으로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127시간>은 롤러코스터 같은 이력의 영화 감독 대니 보일의 9번째 장편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이후 여기저기에서 많은 연출 제안이 들어왔을텐데, 대니 보일 감독의 선택은 아직 다뤄보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할 수 있는 훨씬 단촐한 규모의 프로젝트였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127시간>은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알려진 바와 같이 애론 랠스턴의 자서전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2004)에 기록된 실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그랜드 캐년에서 하이킹을 즐기던 중에 추락 사고를 당해 오른팔이 바위 틈에 끼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된 상태로 127시간 – 계산해보면 5.3일 정도 됩니다 – 을 버틴 끝에 마침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메인 이벤트라는 건 고작해야 좁은 협곡 사이에 갇혀서 괴로워하다가 죽기 직전에 이르러 마침내 빠져나왔다는 것이 전부이고,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는 완전한 예상 밖의 전개가 숨겨져있는 작품인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정중동(靜中動)의 영화라고 할까요.

한쪽 팔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인공 애런(제임스 프랭코)의 조용한 사투와 감정적인 변화의 향방를 면밀하게 따라나서는 작품이 <127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은 <127시간>에 대해 “삶의 소중함에 관한 영화이고, 그 삶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소중함이 드러난다”고 했더군요. 그런 점에서 숀 펜 감독, 에밀 허쉬 주연의 2007년작 <인투 더 와일드>와 일면 상통하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애런이 조난을 당한 이후 구조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조난 당한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여행 계획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캠코더로 유언을 남기는 중에 어머니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던 자신의 무심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영화는 애런을 구원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애런이 알고 지냈던 다른 사람들이었음을 증언합니다. 비록 연락을 닿을 수는 없지만 그들과 만들었던 추억과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의지가 애런으로 하여금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지요.






안경을 쓴 이가 애론 랠스턴

 

<127시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실화로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말 때문에 작품 전체적인 긴장감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너끈히 장편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 해낼 수 있는 이유는 애런 랠스턴의 극적인 실화를 다큐멘터리를 보듯 재현해낸 대니 보일 감독의 연출과 제임스 프랭코의 헌신적인 연기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화장실과 같이 비좁은 장소에서 다채로운 아이디어로 스펙타클한 비주얼을 잘 만들어내곤 하는 대니 보일 감독의 재능이 이토록 작고 비좁은 영화에서도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일본 지진 피해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으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관련 피해자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속히 구호조치와 생활지원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어려운 상황일 수록 희망은 더 소중하니,

부디 작은 힘이라도 끌어 모아 꿋꿋이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입니다.


영진공 일동

“브래스드 오프”, 오렌지주스 협주곡의 기억


마치 어딘가 간질간질하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물린 건지 모르겠어서 그 주변만 긁다가 마침내 ‘결정적 그 부분’을 찾아내고 시원하게 긁을 때처럼 ……

며칠 전 우연히 귀에 들려온 예전 어느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이 그랬다. 그 옛날 내가 어렸을 때나 그 프로그램이 문을 닫을 때도 시그널 뮤직은 계속 그 곡의 그 연주 버전이다. 따다다단 따다다단, 의 약간 빠른 박자로 시작하는.

그러나. 진정으로 내게 당장 다시 듣고픈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음악은 이 곡과 비슷하되 이 곡이 아니다. 그리고 … 미치도록 가려운 느낌의 얼마 뒤, 드디어 생각해냈다. 『브래스드 오프』.

그랬다, 내 깊은 기억과 애정 속에 박혀버린 곡은, 어릴 적부터 무의식 중에 무수히 반복적으로 들어온 토요명화 시그널송의 버전이 아니라, 대학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에 극장에서 본 영화에 나오는 브라스 버전이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에서 연주되는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


 
『트레인스포팅』이 인기를 끌고서, “이완 맥그리거”를 마치 단독 주인공인 양 전면에 내세운 광고로 비로소 개봉될 수 있었던 바로 그 영화. 나도 그를 보기 위해 극장엘 갔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수많은 주인공들 – 밴드 전원이 주인공이었다 – 중 한 명일 뿐이어서 약간의 배반감도 느꼈지만 이 영화의 음악은 좋았다. 테입으로 OST를 샀고 한동안 잘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이 영화와 제대로 교감하지도 못했던 것같다.

신자유주의의 광풍, 소위 대처리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대처의 단호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과 그 일환으로 영국에서 일어난 연달은 광산 폐쇄, 극심한 실업, 노동자들의 절망 … 같은 걸 알기엔 나는 그때 너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몇 년 후, 전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풀 몬티』가 나왔고, 이 영화가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아마도, 영국의 광산노동자의 아픔이 묻어있는 영화가 한국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어필하기 시작한 건 『빌리 엘리어트』 때부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 한국은 IMF를 겪고난 후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의외로 나처럼 이 영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다.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을 연주하는 바로 그 장면이 심지어 자막도 있는 동영상 파일로 올라와 있다. 플레이를 해보니 세상에, 이건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장면이 아닌가.

외골수 지휘자 피터 포슬스웨이트가 단원들에게 ‘오렌지주스 협주곡’이라 소개하는 이 곡, 경영진의 한 명으로 실사 조사를 위해 파견온 여주인공이 같이 연주를 하기 위해 오디션을 받으며 협연하면서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이들의 연습장면은 어느새 이 광산노동자들의 필사적인 꿈과 기대와 희망과 절망과 눈물과 웃음을 좌우할 경영진과 노조 간 마라톤 협상의 장면, 협상 결과를 취재하며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과 경영진의 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이 연주하고 있는 바로 그 음악에 스스로 푹 빠져있는 지휘자와 악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역시나 내게 아랑훼즈 협주곡은, 탄광 노동자들이 절망과 꿈과 희망과 삶의 모든 것을 각각의 브라스 악기에 걸고 연주한 『브래스드 오프』의 영화음악 버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장면과 피터 포슬스웨이트의 병실 밖에서 연주한 대니 보이 장면 – 절망에 악기를 팔아먹은 “이완 맥그리거”는 휘파람으로 자신의 파트 연주를 대신한다 – 이, 심지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연주되는 결선 연주 장면과 음악보다도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박완서 – “꿈엔들 잊힐리야” (원제 : 미망), 15년 만에 다시 읽기


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영진공 라이

 

“엘리자베스타운”, 집으로 돌아오라


 

“Welcome Home”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은 이 말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 온 걸 환영한다는 얘기인데, 그 반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딴에는 자신들의 모든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전 세계로 뿌린 상품이 참 고약하게도 시장에서 거절 당해 반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안타깝기도 할 터이다. 그리도 원대한 포부와 그림을 그려가며 떼돈도 벌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확신에 차 들이밀었던 상품이 차갑고 냉랭한 조롱 속에 몽땅 되돌려 보내졌으니.

이런 상황을 감독은 단순한 “failure(실패)”가 아닌 “말짱 꽝(fiasco)”이라 표현하였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내용은 텅 빈 참으로 낯 뜨거운 그런 실패라 본 것이다.


여기서 잠깐, fiasco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 fiasco는 “끼안띠(Chianti, 이탈리아의 고급와인)”을 담는 병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와인의 원산지인 Chianti에 어느 중요한 인물이 방문했었는데, 그 사람을 대접하려고 꺼내오는 fiasco마다 웬일인지 술은 한 방울도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fiasco라는 말은 “태산명동에 서일필”과 비슷한 뜻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은 오직 이 말만 되뇐다. “난 괜찮아(I am fine).”
전혀 괜찮지 않은 걸 자기가 알고 남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데도 그저 그 말만 되뇌는 것이다. 그런 주인공을 붙잡고 사장은 말한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 시장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이런 시장의 흐름은 자신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거라고. 둘 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게다.


그러면서 사장은 또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환경단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거기에 이런 표현이 따라붙는다.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 (We could saved the world ……)”

이게 바로 감독이 보는 미국이다.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세상의 모든 독재를 종식하겠다고, 그리고 소위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며 그들의 꽃다운 젊은이들에게 온갖 최신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 이역만리 외국으로 등 떠밀어 내보냈지만, 아무도 진정으로 반기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따라 자국의 병력을 파견한 나라 안에서까지 미국에 대한 적대감만 높아졌을 따름이다.

이쯤 됐으면 이제 상황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과 기술을 투자했다 해도 소비자가 싫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인데, 그래도 만들어서 공급하는 이는 자꾸만 “이거 좋은 물건이니 저렴한 가격에 한 번 써 봐”라고 하며 거의 강매하다시피 매달린다. 그러면서 소비자만 탓하고 “왜 나만 미워하느냐”고 따지려 든다.

실패는 저지르기 보다 인정하기가 더 힘들다. 그리고 실패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실패가 발생하면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왜 그런 실패를 저질렀는지 주구장창 따지고만 있거나 아니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고 허구한날 우겨대며 계속 그 쪽으로 쭉 나가기만 하면 자꾸 출구에서 멀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패를 맛보았는지 얘기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해 주는 것이다.
“I don’t care(그건 상관 없어)!”

어서 실패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판단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자기가 보는 위대한 미국을 그려낸다. 그에게 있어서 위대한 미국은 중동의 사막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미의 밀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는 위대한 미국은 바로 그 곳, 미국의 사람들 속에 그냥 있었을 따름인 것이다.

비록 300년도 안 되는 역사지만 그 기간 동안에 지금의 미국을 건설한 그들이 바로 위대한 미국이라는 걸 그냥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차를 몰아 달리며 들러보는 미국 역사의 흔적이란 게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다 미국을 만들어 온 것들이며, 게다가 그들에겐 편견과 억압에 맞서 피 흘려 인권을 쟁취해 온 어디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잖은가.



그렇게 좋고 훈훈한 내 집(Home)이 거기 있는데 왜 반겨주지도 않는 바깥에서 생 고생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들과 웃고 울고 일하고 즐기고 애태우고 보람을 느끼고 그러면서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면 되지, 왜 굳이 미국이 위대하다는 걸 바깥에다가 완력으로 과시하고 억지로라도 인정 받으려 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안 해도 세계 자본주의와 그 시장은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예전과 달리 미국이 외부에 행사하는 완력이 오히려 미국의 이익을 깎아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전에 뉴올리언즈에 휘몰아친 태풍이 그랬고 요즘의 티파티(Tea Party)가 들춰 내 보여줬다시피 미국 내의 갈등과 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렇다고 아주 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기꺼움으로 진정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곳에서부터 힘쓰라는 거다. 그래야 “Welcome Home”을 말하는 입김 속에 담긴 씁쓸함이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바뀔 수 있을테니.

영진공 이규훈